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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아 Sep 20. 2024

부적

  예전 어느 명절 때 방송에서 들은 사연이다.

  평소 차분하고 생각이 깊은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머뭇머뭇하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더니 한숨을 내쉰 후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편이, 즉 당신의 아들이 요즘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신중하고 묵직한 성격의 며느리가 한 말인지라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덜컥 내려앉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며느리에게 나는 무조건 네 편이니 당황하지 말라며 어미인 내가 아들과 대화를 해 볼 테니 일단 기다려보자라고 달래며 전화를 끊었다.


  아들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게 아닌가 싶어 놀란 가슴에 시어머니는 부랴부랴 어떻게 된 거냐고 추궁하였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별일 아니라며 동아리 활동을 조금 하고 있을 뿐이니 잘 마무리하겠다고 하였다. 아들의 말에 안심을 한 시어머니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평소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그녀였으나 그때 만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주위 사람의 권유에 의해 용하다는 사주집에 가게 되었다. 뭐라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서 들은 전언은 올해 아들에게 풍(바람)이 끼었으니 부적을 써 보라는 거였다. 외도를 막게 해 주는 부적은 일반 부적과 달리 가로가 30센티미터가 넘고 세로는 15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다. 거의 사람 몸 크기 만한 거대한 부적을 들고 와 놀라는 며느리와 함께 아들 내외의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정성스레 깔았다.


  무거운 매트리스를 들어내고 부적을 깔던 며느리가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는 그때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며느리의 저 웃음이 그저 쓴웃음으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후 며느리가 전화를 걸어와 남편과 충분한 소통을 못해서 빚어진 오해였으니 걱정 마시라며 신경 써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왔다. 그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한시름 놓으면서도 행여라도 아들 내외에게 불온한 일이라도 생길까 싶은 노파심에 '그래도 그 부적을 당분간은 그대로 놔두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가족 갈등이 대두되는 명절에 걸맞은 에피소드였는데 이 웃지 못할 사연이 가슴에 남았다. 예전에 흔히들 말했듯이, 여자가 잘해야 남자가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다고 말하는 시어머니일 수도 있었는데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불안해할 며느리를 안심시키며 무조건 며느리 편을 들어준 사려 깊은 시어머니의 큰 배포가 멋지다. 이런 지모智謀있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충분한 의지가 되어준다.


  평소 지혜롭고 냉철했던, 무속신앙에 전혀 관심도 없던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조금은 뜬금없는 제안을 아무 말 없이 따랐다는 것에서도, 그렇게 신심 깊은 권사였던 시어머니조차 걱정과 불안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좌절했다는 점에서도 인간의 심성이 얼마나 여린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인생에 불어닥치는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나 파도에 심신이 휩쓸릴 때가 많다. 기진맥진하기도 하고 지치고 낙담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에 마음이 시릴 때도 있고 억울함에 잠 못 이루기도 하며 인간에 대한 미움 때문에 험악한 감정에 잠식될 때도 있다. 피해 갈 수 없다면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게 받아넘기는 수밖에 없다.


  다들 다양한 자기 만의 내공으로 삶을 통과해 내 여기까지 다다랐다. 장하지 않을 수 없다. 번잡하고 얄궂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살아내었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당장 내일의 안위를 알 수 없으나 이 자리에 발을 디디고 있는 스스로에게 잘 버티었으니 안심하라고 토닥이며 나를 견고하게 해 줄 마음의 부적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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