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했던 것들이
다시 소중해진 순간

글을 시작하며 ..


일상 속에서 느끼고 깨달았던 것들을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제가 겪은 고통이 작아 보일 수 있겠지만,

저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싶어 이렇게 적어봅니다.




벌써 10년전 일입니다.

당시 저는 지병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 중 이었습니다.

병가를 내고 집에서 혼자 누워서 쉬고 있던 중,

갑자기 배가 아파옵니다.

그리고 혈변이 시작되었습니다.

변기가 새빨갛게 물드는 공포.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버텼지만 증상이 지속되었습니다. 몇시간을 버티다가 친구와 상의한 끝에 결국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혈변은 계속었습니다.


응급실은 전공의때 의료진으로 일을 했던 장소였지, 환자로서 응급실을 찾아간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어색하게 접수를 하고 누워 문진을 받았습니다.

소변검사를 위해 화장실을 다녀오던 순간,

하늘이 빙 돌며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았습니다.

"어.. 내가 왜이러지?"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현기증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모든 의료진이 절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자신에게 달려온다면,

그건 좋지 않은 신호입니다. )

그리고 의료진분들의 부축으로 저는 재빨리 침대에 눕혀졌고, 다리는 높이 들렸습니다.(혈압이 떨어지면 다리를 올려야합니다.) 수액의 속도도 아주 빨라졌습니다.

마치 현실이 아닌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한동안 누워서 절대 안정을 취했고 현기증은 나아졌습니다.

혈액검사도 하고 CT도 찍은 결과 걱정했던대로 수술후 출혈(post-OP bleeding)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수술동의서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는 희박한 확률.

전공의시절 수술을 앞두고 걱정하던 환자분들께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럴수 있다는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곤 했던 내용들.

그 작은 확률이 실제가 되어 저에게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난생처음 '병'으로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재수술 여부는 하루 정도 관찰 후 결정하기로 했고, 그날 밤은 금식상태로 지냈습니다.

힘들고 길었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

다행히 피는 멎었고 수술은 피할수 있었습니다.

안도감과 함께 아침식사를 받았습니다.

평소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병원밥이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습니다.

반찬하나하나, 밥알들 하나하나가

귀하고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기운이 조금 생겨 폴대를 끌고

병원 복도로 나가 보았습니다.

어두컴컴한 병실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창문너머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창밖의 나뭇잎은 햇빛을 받아

선명한 초록색을 띄고 있었고,

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칩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응급실 신세를 지고나서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런것이구나.

(결과적으로 출혈로 인해 헤모글로빈이 5g/dL가량 저하되었지만, 다행히 추가출혈은 없었고 지금은 아주 건강합니다. 다만 '응급실을 조금 늦게 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영어로 나타내는 영어 표현중에는 appreciate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감사하다는 의미를 넘어

다른 뜻도 포함합니다.

라틴어 appretiare 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원래 "가치를 매기다, 평가하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시간이지나며 "그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감사하다"는 감정적 의미까지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의 가치도 인식하고 감사의 마음을 갖는 appreciate의 자세.

그날 병실 복도에서의 짧은 순간, 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 의미를 온전히 느꼈습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햇살과 바람,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잃어봐야만

그 존재의 소중함을 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걸 잃어볼 수는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appreciate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단조로운 일상도,

다시보면 소중한 순간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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