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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Mar 22. 2021

<안티고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살아있을 수 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프란츠 카프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 지어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프카가 말했듯이 문제는 자유가 아니라 출구다. 아버지의 문제 역시 어떻게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가 하는 오이디푸스적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거기서 아버지가 찾지 못했던 길을 찾아낼 것인가다."

 고전을 대할 때 작가는 수많은 '아버지'들을 만난다. 고전을 쓴 아버지, 그것을 위대하게 해석해낸 아버지 등. 고전을 재창작한다는 것은 그 수많은 아버지들이 찾지 못한 자신만의 출구를 찾는 일이다. 희곡 <안티고네>의 경우 고대 그리스의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이후로 수천 년간 연극으로 수천번 이상 공연되고 재창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영화 <안티고네>의 감독이자 작가 소피 드라스프는 사랑이라는 출구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안티고네를 마주했다.


 원작 희곡 <안티고네>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여 낳은 딸이다. 테베의 왕인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이때 그를 보살핀 것이 안티고네다. 테베에 남은 안티고네의 두 오빠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왕권을 두고 다투는데, 폴리네이케스는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아 모국 테베를 공격해 에테오클레스를 죽이고 전투 중 자신도 목숨을 잃는다.

 이후 안티고네의 삼촌이자 오이디푸스의 삼촌이기도 한 크레온이 왕이 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만 장례를 치러주고 이방인과 함께 모국에 전쟁을 벌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광야에 버려둔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라 판단하여 몰래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른다. 이에 안티고네는 체포되어 동굴에 갇히고 끝내 자살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안티고네를 사랑하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도, 그녀의 어머니이자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안티고네의 동생인 이스메네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티고네와 그의 할머니 메노이케우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화 <안티고네>는 캐나다를 배경으로 이민자 '안티고네'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다. 안티고네의 큰오빠 에테오클레스, 작은오빠 폴리네이케스, 언니 이스메네는 할머니 메노이케우스와 함께 고향을 떠나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해 살고 있는 이민자다. 안티고네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니는 모범생, 큰오빠는 인기 있는 지역 리그의 축구팀 스타, 언니 이스메네는 미용실에서 착실히 일하지만 작은오빠 폴리네이케스는 갱단에서 위험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하루, 두 오빠는 친구들과 공터에서 놀던 중 경찰과 마주한다. 갱인 폴리네이케스는 지레 겁먹고 도망가다 체포되고, 이를 말리려던 에테오클레스는 비무장 상태였으나 경찰이 과잉 대응하여 발사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폴리네이케스는 경찰과 충돌, 결국 경찰 폭행죄와 전과로 인해 영주권을 박탈당하고 태어난 나라로 추방되게 된다. 내전이 지속되고 있고 그 내전에서 부모도 잃은 안티고네 가족에게 그곳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를 탈옥시켜 어디로든 고국이 아닌 곳으로 빼돌리려 한다. 형을 억울하게 잃은 폴리네이케스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오빠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후 긴 가발을 쓴 채 할머니와 함께 면회를 간다. 간수들이 그들을 보지 않을 때 재빠르게 오빠와 옷을 바꿔 입고 가발도 씌워준 후 자신은 감옥으로, 오빠는 세상으로 내보낸다. 이스메네도 이를 도와 폴리네이케스가 미국으로 밀입국할 차편을 마련한다.

머리를 자르고 오빠를 구하기로 한 안티고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로 인해 안티고네는 체포되어 투옥되고, 할머니 역시 구금된다.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학교 친구 하이몬은 전직 변호사이자 유력 정치인인 자신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라 권유하지만 안티고네는 이를 거부한다. 이후 안티고네는 변호인을 두지 않은 채 줄곧 자신은 유죄라 법정에서 증언하다가 국선 변호사를 만나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전까지는 경찰의 잘못으로 죽은 에테오클레스에게 우호적이던 여론이 폴리네이케스의 탈옥과 갱단 전력을 알게 되자 이민자 혐오로 돌아선 것이다.

 이에 안티고네와 변호사는 오히려 재판을 이용하기로 한다. 법정에 다시 선 안티고네는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자신은 법을 어길 것이며, 이는 자신의 심장이 시키는 일이라 증언한다. 하이몬은 아버지와 안티고네 문제로 갈등한 후 차고에서 지내며 안티고네를 응원할 수 있는 여러 일들을 벌인다. 그녀의 얼굴을 아이콘으로 만들어줄 그림을 그리고, 그녀와 처음 데이트할 때 울렸던 자신의 벨소리를 법정에서 모두와 함께 울리는 등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안티고네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고 그녀를 응원하는 시민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 지점부터가 영화는 원작과 큰 차이를 보인다. 원작에서 안티고네는 철저히 혼자고,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에 맞서 안티고네를 구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자살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하이몬의 노력과 안티고네의 증언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안티고네를 응원한다. 또한 하이몬의 아버지는 원작과 달리 크레온이 아니다. 영화에서 크레온은 국가 자체이며, '시민'과 '시민권'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이방인을 배척하는 법 자체인 것이다.

 영화의 백미는 폴리네이케스가 살아서 체포되어 돌아오는 장면부터다. 이전 장면까지는 착한 사람들이 참 많이 사는 세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없이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움직여주는 하이몬, 그런 아들의 이방인 여자 친구를 편견 없이 대하는 하이몬의 아버지 크리스티앙,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이런 이방인들의 진심을 알고 함께 움직여주는 시민들.

오빠를 탈옥시킨 죄로 법정에 선 안티고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모든 희생과 응원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폴리네이케스가 미국으로 떠나지 않고 어딘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체포된 이후 안티고네는 더 이상 착한 아이콘이 될 수 없다. 반쯤 미친 상태에서 폴리네이케스와 판사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결국 폴리네이케스는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 역시 폴리네이케스와 함께 캐나다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에 하이몬의 아버지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안티고네의 후견인이 되어 그녀가 시민권을 얻어 캐나다에 잘 정착할 때까지 키워주겠다고 한다. 이스메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안티고네는 거절한다. 가족을 잃고, 그러한 사실을 잊고 일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이몬과 몸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러고는 폴리네이케스, 할머니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로 향한다. 그때 출국장에서 벨소리가 들린다. 하이몬과 처음 만난 날 들렸던, 법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함께 울렸던 그 벨소리가.


 이 영화는 안티고네를 구하는 이야기이다. 안티고네에게 다른 삶을, 다른 존재 방식을 제안함으로써 지금까지 없던 출구를 만드는 이야기이다. 원작의 안티고네는 죽을 수밖에 없다. 국가의 법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고 행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그 주변 인물들 역시 안티고네를 구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반면 영화는 삶이라는 존재 방식 안에서 안티고네의 정의를 지키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오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옥에서 꺼낼 수밖에 없었던 안티고네를 끝까지 지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하이몬이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은 벨소리에 뒤돌아보는 안티고네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 벨소리의 주인이 하이몬인지, 안티고네를 지지하는 익명의 누군가 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벨소리의 주인이 안티고네와 함께 전쟁의 땅으로 함께 떠나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안티고네와 하이몬의 첫 만남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중요한 점은 안티고네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불러줄 때, 나를 기억할 때 비로소 사람은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원작 안티고네와 이 영화의 안티고네 사이의 큰 차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부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치던 동굴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티고네와, 시민권을 거부하고 죽음의 땅으로 돌아가지만 끝까지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주는 안티고네.

 무언가와의 싸움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연대는 유약하고 승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삶은 지속된다. 함께하던 이가 떠나고, 중요한 싸움에서 패배하더라도 삶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그러한 밑바닥에서 다시금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은 바로 내가 아니라 남으로부터 온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나를 기억하고 찾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삶을 살아갈 가치가, 당장 눈에 보이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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