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현실적인 트래직-코믹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단 두 가지 종류의 영화만 존재한다고들 한다.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참 쉬우면서도 주관적이고 무책임한 구분이지만 명확한 구분이다.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겠지만 내게 좋은 영화는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명확한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장르의 구조를 잘 따르는 동시에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는 선택들로 이뤄진 영화다. 이런 측면에서 <돈 룩 업>은 분명 좋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코미디인 동시에 비극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말 그대로 부서져 버리니 말이다. 이처럼 혜성이 날아와 지구에 충돌하며 모든 것이 멸망하는 비극적 이야기를 코미디로 담는 선택 자체도 흥미롭다. 나아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좁게는 기후 위기부터 시작해 이 사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온갖 우선 순위들을 들먹이며 미루는, 넓게는 일상에서의 중대한 결정을 어떻게든 회피하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천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가 혜성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담당 교수인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동료들은 이를 축하하며 연구실에서 조촐하게 파티를 벌인 후 궤도를 계산해보는데 심상치 않다. 6개월 후 그 혜성은 지구와 정면 충돌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한 끝에 NASA와 백악관에 연락하고, 둘은 즉시 워싱턴으로 소환된다.
여기까지는 흔한 재난 영화들의 시작과 유사하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를 밝히고, 그들이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즉각 펼쳐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사실은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 주인공 디비아스키와 민디 캐릭터의 설정이 흥미롭다. 두 사람은 천문학으로 유명한 Michigan State University(MSU) 소속이지만 미안하게도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대학이 아니면 모른다. 게다가 최상위권 명문대인 University of Michigan의 아류 같지 않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학 3개의 이름만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혜성을 직접 발견한 디비아스키도 참 위태롭다. 그녀는 박사학위는 아직 받지 못한 '수료생'이다. 분명 수료생은 박사학위를 향해 가는 과정이지만 많은 이들은 그런 과정을 미완성이자 불완전한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뭐냐, 어쨌든 박사는 아니잖냐, 이런 식이다. 심지어 '여성'에다가 그 이름은 '순혈 미국인'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그런게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다가 외모와 패션 취향은 데이빗 핀처의 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루니 마라 만큼이나 저속해 도저히 지식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문제는 너무도 거대한 나머지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움직여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것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은 '정치인' 뿐이다. 이 영화는 코미디 답게 그들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정치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 올린(메릴 스트립)은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지지율을 관리하는 데에 급급하다. 혜성이 충돌하려면 6개월 '이나' 남았으니 정치적으로 가장 효과적일 때 이 이슈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다.
동시에 대통령은 자신의 당선에 도움을 준 이들을 챙겨주느라 바쁘다. 특히 초거대기업 배시의 대표 피터는 올린이 당선되는 데 어마어마한 후원을 했기 때문에 국가 안보가 걸린 회의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그를 상전으로 모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정당이 권력을 창출하려는 의지를 가진 집단이며 자본은 그 권력을 활용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이는 당연할 수도 있겠다. 너무도 현실적이라서 웃음이 나오다가도 슬플 정도다.
아직 언론은 희망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정론지라 불리는 언론사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쁘고, 최고의 인기 TV 프로인 <The Daily Rip>은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가슴을 한껏 모은 브리(케이트 블란쳇)와 유머러스하고 섹시한 잭(타일러 페리)이 모든 문제들을 '쿨'하게 다룬다. 6개월 후에 인류가 멸망하는 문제를 미루고, 이용하고, '쿨'하게 다루는 이 모든 상황에 미쳐버릴 것 같은 디비아스키는 결국 방송에서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다. 미친 사람이 하나 추가되어 그녀의 절규는 밈으로 떠돌 뿐이다.
다행히(?) 대통령이 보안관이자 포르노 배우 출신 남자친구를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하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는 바람에 지지율이 떨어지자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무인 우주선으로 미사일을 쏘면 되지만 영웅을 만들기 위해 극우 퇴역 군인을 우주선에 태워서 혜성을 격추하겠다는 것이다. 그래, 이쯤 되면 어찌되어도 좋다. 혜성만 어떻게든 막아보자. 하지만 다시 미안하다. 배시의 최고 경영자 피터가 혜성에 수많은 광물, 그것도 중국이 독점하고 있는 광물들이 가득하다며 혜성을 폭파시키지 말고 조각내어 미국 영해에 떨어뜨리자는 것이다. 페루에 쓰나미가 발생하겠지만 그건 돈을 주고 해결했다.
결국 혜성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기(Look Up) 시작한다. 그저 지방대 출신 이민자인 미친 연구원의 소동으로 받아들이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나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그저 음모론일 뿐이라며 현실에 충실하라 한다(Don't Look Up). 애석하게도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의 혜성 폭파 프로젝트도 실패로 돌아가고, 남은 것은 배시의 작전이 성공하길 기원하는 것 뿐. 과연 성공했을까? 아니, 실패. 지구는 시원하게 박살난다. 물론 배시의 대표 피터와 대통령 올린을 비롯한 귀한 분들은 우주선을 타고 탈출했지만, 디비아스키와 민디를 비롯한 대다수는 죽음을 맞이한다.
출연진과 제작진들은 이 영화를 분명히 '기후 위기'와 관련한 영화라고 반복적으로 밝힌다. 실제로 언론과 다수의 사람들이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대하는 태도는 영화 속 디비아스키를 대하는 태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최근의 상황은 과연 나아졌을까? 근 1-2년 사이에 많은 언론들이 기후 위기에 대한 다양한 특집 기사와 보도를 다루고 있지만 대중에게 체감되는 것 같지는 않다. 눈 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충돌하려면 6개월이나 남은 혜성처럼 말이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바다가 넘쳐 흐르고 산이 무너진다면 모를까, 기후 위기와 관련된 정보들은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뿐만이 아니다. 당장 도사리는 전쟁의 위협,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죽음, 끊임없이 목숨을 끊는 이 사회의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애초에 없다고 여겨지는 장애인들과 소수자들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눈 앞에 곧바로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도처에 존재하는 이런 문제들을 마주할 수 있는 통로인 요즘의 미디어들이 영화보다도 더 스펙타클하고 유튜브보다도 자극적으로 소비될 뿐이라는 점이다.
<돈 룩 업>이 탁월한 점은 쉽게 빌런으로 받아들여지는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약자와 대중들까지 모순을 잔뜩 지닌 현실적인 캐릭터로 그렸다는 점이다. 트럼프와 부시, 오바마의 단점만 모아놓은 듯한 올린 대통령, 자본가들의 이면만 골라담기 한 것처럼 보이는 피터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유명 가수 라일리(아리아나 그란데)가 Look Up을 노래할 때 환호하는 사람들은, Live Aid 에서 퀸이나 U2가 아프리카를 돕자고 노래할 때만 환호하는 우리와 닮았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마주하지 않는 데에는 대단한 빌런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외면하는 모든 이들이 빌런인 것이다.
코믹하되 가짜같지 않은 선택들로 심각하고 현존하는 문제를 회피하는 모두를 비판하는 이 영화는 '모두까기 인형'이다. 이상하고 코믹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 속 우리와 너무도 닮은 사람들을 잔뜩 모아놓고 모두까기한 후 지구를 폭파시키는, 말 그대로 끝까지 가는 영화. 하지만 여기엔 단 하나의 희망이 있다. 직시하는 것. 그리고 내 옆의 사람과 손을 잡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마주한, 하지만 미뤄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식이다. 심지어 당장 해결할 수 없다 해도 말이다.
배시의 최고경영자 피터는 알고리즘을 통해 사람들이 죽는 모습까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예측은 잘 들어맞는다. 민디 박사가 95%의 확률로 외롭게 홀로 죽으리라는 예측만 빼고. 민디 박사는 그 5%의 확률로 홀로 죽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지구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닥쳐오는 끔찍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5%의 가능성으로 내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Look Up. 집 밖으로 나가 고개를 들어 직접 바라보고 마주하라, 내 곁의 소중하고 진실된 이들과 함께. 내가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닐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