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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Jan 28. 2021

<반도>

와해된 공동체, 던져지지 못한 한 문장

*이 글에는 <반도>, <부산행>, <서울역> 세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좀비물을 즐겨 보는 편이 아니다. 태어나서 본 좀비물의 수를 다 합쳐도 10편 정도 될까? 재밌게도 그중 6편을 최근에 봤다. 드라마 <스위트홈>, <킹덤>, 영화 <#살아있다>, <부산행>, <반도> 그리고 <서울역>까지. 전염병의 시대와 묘하게 맞아떨어져서일까, 나 같은 문외한도 자연스럽게 보게 될 정도로 최근 국내에서 좀비물이 많이 제작되는 추세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중 4개의 영화들은 지금 쓰고 있는 '2020년 한국 박스오피스 리뷰'를 위해 찾아본 작품들이다. 우선 6월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인 <#살아있다>를 보고 아쉬움이 컸다. 혹시 장르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해 영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싶어 흥행에 성공한 <부산행>을 봤다. 그때 확신이 생겼다. 장르에 대한 이해와 팬심이 없어도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의 메시지와 내적 완성도를 납득할 수 있다면 영화를 즐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주말 7월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인 <반도>를 본 후 같은 이유, 아쉬움 때문에 연상호 감독의 전작 <서울역>을 찾아봤다. 이미 <부산행>을 흥미롭게 봤기 때문에 같은 감독이 만든 같은 세계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커서 아쉬움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역>까지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을 모두 본 후 <반도>는 <부산행>과 <서울역> 사이에 낀 애매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의 소위 '신파'라 하는 억지 감동을 문제 삼는다. 주요 인물들이 죽거나 죽음을 결심했을 때 등 좀비물 특유의 긴박한 템포감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 유발을 위한 장면들이 과도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왜 이 영화에서 '신파'라 불리는 장면들이 문제가 될까? 이를 영화의 메시지 차원에서 전작 <부산행>, <서울역>과 비교하며 되짚어보자.


 영화의 처음은 한국의 모 바이오 기업의 바이러스 유출로 인해 좀비가 출몰하기 시작한 <부산행>의 시간과 같다. 군인 정석(강동원)은 누나(장소연)와 매형 철민(김도윤) 그리고 조카(문우진)를 차에 태우고 해외로 피신하기 위해 항구로 향한다. 가는 길에 도움을 요청하는 어떤 가족을 만나지만 정석은 외면하고 계속 차를 몰아 항구에 도착한 후 안전하게 배에 탑승한다.

 일본으로 향하던 배는 갑자기 항로를 홍콩으로 변경하는데, 일본에서 한국의 난민들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배는 무사히 홍콩에 도착했지만 그 배에서도 감염자가 나오면서 정석의 누나와 조카도 좀비가 됐고, 이런 상황 때문에 더 이상 주변국들은 한국의 난민들을 받지 않기로 합의한다. 한국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누구도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버림받은 땅, 이름 없는 '반도'가 된다.

홍콩에서 이방인이자 보균자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정석 (사진 출처: 다음 영화)

 4년 후. 홍콩의 범죄조직 보스는 반도에 들어가 좀비들에게는 무의미한 달러 화폐를 잔뜩 가지고 나오려 한다. 원칙적으로 반도에 드나드는 것은 불법이나 해양경찰 등을 매수해 루트는 확보된 상태. 이미 한 팀이 시도했지만 돈이 가득 실린 트럭을 몰고 탈출하던 중 서울 목동 근처에서 소식이 끊겼다. 다음 팀을 꾸려 그 트럭을 가지고 인천항까지 돌아와 위성전화로 연락하면 바다에서 대기한 배가 그들을 구출하는 것이 계획이다.

 이 계획을 실행하게 되는 것은 홍콩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반도의 지리를 잘 아는 한국 출신 난민들이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서로 떨어져 지내던 정석과 철민이 이 계획을 위해 불려 온다. 정석은 그곳에 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 생각하지만 홍콩에서 병균 취급받는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이 무모한 계획에 합류하기로 한다. 둘을 포함해 총 4명이 반도로 출발하게 되고, 전직 택시기사였던 팀원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트럭을 발견한다.

 트럭을 몰고 인천항으로 되돌아가던 이들을 쫓는 것은 좀비뿐만이 아니다. 무장한 사람들이 일행을 추격하고, 양쪽으로부터의 도피 과정에서 결국 이들은 와해된다. 택시기사를 포함한 2명은 사고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고, 철민은 트럭으로 피신했다가 무장한 이들에게 생포, 정석은 정체 모를 아이들에 의해 구출받는다. 정석을 구해준 아이들은 영화 초반 정석이 항구로 대피하던 도중 외면했던 어떤 가족, 민정(이정현)의 아이들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은 631 부대의 황 중사, 서 대위, 그리고 '들개' 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처럼 반도에는 감염되지 않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었다. 무장한 사람들은 원래 군인으로 631 부대였는데,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고 국제사회가 반도를 포기했다는 사실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약탈을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계급상 그들을 이끄는 것은 서 대위(구교환)지만, 약탈 작전에 실제로 투입되며 병사들과 사선을 넘나드는 황 중사(김민재)를 따르는 무리들도 꽤나 있다. 이들 외의 다른 민간인들은 '들개'라 불리며 좀비들과 631부대 양쪽으로부터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민정은 정석으로부터 돈이 실린 트럭을 가지고 인천항에 가면 구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같은 시점에 트럭의 내용물을 검토하던 서 대위와 김 이병(김규백)은 돈가방과 위성전화를 발견해 그 계획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민정, 정석 일행과 서 대위 일행에게 트럭을 통한 탈출이라는 같은 목표가 생긴다. 민정, 정석 일행은 631부대로 침투해 트럭을 탈취한 후 무사히 인천항으로, 서 대위 일행은 단순한 식료품 트럭으로 알고 있는 황 중사 무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트럭을 몰고 부대를 빠져나와 인천항으로 가야 한다.

631 부대로 침투하는 정석과 민정, 철민을 구하는 정석 (사진 출처: 다음 영화)

 631 부대에 침입한 정석은 철민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구한 후 탈출하려 한다. 좀비에 물린 조카와 누나를 살리지 못했던, 항구로 향하다 외면했던 정민 가족에 대한 후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막으려는 황 중사와 부대원들에 의해 철민은 죽고 정석만이 정민의 도움으로 빠져나온다. 트럭과 함께 부대를 빠져나가려던 서 대위를 정민이 제압하고 탈취한 트럭으로 정석을 데리러 온 것이다.

 황 중사 무리의 추격을 피해 인천항에 도착한 정석과 민정 일행은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도착해 있는 서 대위에게 트럭을 다시 빼앗긴다. 서 대위는 트럭을 몰고 탈출선에 탑승하지만 돈을 나누기 싫은 홍콩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은 계속된다. 서 대위는 마지막 힘을 다해 트럭으로 탈출선 문이 닫히지 못하게 하고, 마침 해가 뜨며 좀비들이 배로 쏟아져 들어와 전원 감염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좀비들이 몰려와 정석과 민정 일행도 몰살당하려던 찰나, 극적으로 UN 헬기가 와서 그들을 구출한다.  


 다시 '신파'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사실 '신파'는 어원상 '새로운 파도(new wave)'의 의미로, 일본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기존 일본 전통극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으로 만든 연극들을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 개념이 어쩌다가 '관객들에게 억지로 슬픈 감정을 유발하는 장면'을 일컫는 말로 변화하였는지에 관한 궁금증은 잠시 제쳐두자. 왜 <반도>에서 '신파'는 문제가 되는가?

 가장 중요한 지점은 영화의 메시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메시지가 명확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면 주인공이 죽는 장면에서 슬픈 음악을 사용하며 감정을 유도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적절하게 사용된 슬픈 장면은 굳이 '신파'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반도>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앞선 두 영화를 먼저 생각해보자.

노숙자 좀비들을 피해 유치장으로 피신한 혜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서울역>은 '버림받은 채로 사느니 좀비가 되는 것이 낫다'는 어둡지만 단순 명료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서울역은 열차 여행의 낭만적인 추억이 깃든 장소가 아니다. 서울역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이면 한 번쯤은 봤을 수많은 노숙자들의 '서식지'이다. 사회가 노숙자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좀비를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서울역과 그 근처를 불결하고 낙오된 그들의 서식지로 방치해두고, 소동이 일어나면 경찰이 출동해 제압한다.

 주인공 혜선(목소리 심은경)은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다가 포주로부터 도망쳐 나온 후 서울역 근처 여관에서 남자 친구 기웅(목소리 이준)과 함께 지내는 가출 청소년이다. 돈이 없는 기웅은 혜선의 동의 없이 그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성매매를 알선한다. 이런 삶을 사는 혜선은 가족부터 시작해 사회 내의 안전한 공동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공동체 바깥의 삶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좀비가 발생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아니, 그들은 차라리 좀비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감염이 되었든 안되었든 서울역 일대 시민들을 외부와 차단하고 사살하는 국가 권력이나, 좀비로부터 도망치는 혜선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아버지 석규(목소리 류승룡)는 알고 보니 친아버지가 아니라 성매매 여성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포주였다는 사실이나, 버림받은 이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좀비가 되는 방법뿐인 듯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포스터의 홍보 문구는 영화의 많은 것을 말해준다. 좀비가 어떤 바이러스 때문에 퍼지는 생물학적 질병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공동체가 누군가를 끊임없이 소외하고 방치하면서 작동하는 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 영화의 주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서 나오는 부동산, 대출, 성형외과 광고는 밝은 미래를 말하지만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즉 <서울역>은 디스토피아가 픽션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게 만드는 관점과 힘을 가진 영화인 것이다.

좀비가 출몰함으로써 딸과 지금껏 가장 가까운 시간을 보내게 된 석우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반면 <부산행>은 '가족애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살아남게 해 준다'는 보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주요 인물들은 <서울역>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사회적 안전망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령 주인공 석우(공유)의 경우 잘 나가는 애널리스트다. 중요한 점은 이들도 내적으로는 끊어진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석우는 아내와 별거 중이며 자신이 데리고 사는 딸 수안(김수안)에게도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을 쓰지 못하고, 임신한 성경(정유미)과 남편 상화(마동석)의 관계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즉 흩어진 가족들에게 좀비라는 시련이 다가오며 다시금 가족애가 부각되는 것이 이 영화의 흐름이다. 석우는 아내에게 수안을 데려다 주기 위해 탑승한 부산행 기차에서 좀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딸과 지금껏 가장 친밀하고 긴 시간을 보낸다. 평소 무심해 보이던 상화 역시 성경을 위해 목숨을 다해 좀비와 맞서 싸우고, 죽기 직전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준다.

 결국 성경과 그의 뱃속 아이, 그리고 수안만이 살아남아 걸어서 터널을 지나 안전지대로 향하는데, 군인들은 두 사람이 좀비인지 생존자인지 식별하지 못하고 사살하려 한다. 그때 수안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버지 석우에게 들려주고 싶어 학예회에서 준비했던 그 노래, 하지만 석우가 학예회에 오지 않아 끝까지 부르지 못한 그 노래를. 바로 이 노래 덕분에 군인들은 그들을 좀비가 아니라 생존자라 인지하고 구출한다. 좀비는 노래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가족을 위해 노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산행>과 <서울역>은 공통적으로 좀비의 출몰로 무너지는 사회를 그리지만 <부산행>은 그 안에서 가족애라는 긍정적 가치를 찾아내는 반면 <서울역>은 절망에서 더 심한 절망으로 이행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부산행>의 경우 감정적인 장면들이 사용되지만 영화의 메시지와 부합하는 선택이기 때문에 '신파'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역>은 애초에 감정적인 장면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삶보다는 차라리 좀비가 되는 게 낫다는 영화의 메시지와 맞지 않으니 그런 장면이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폐허가 되어 더 이상 '한국'이라 불리지 않는 '반도'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제 <반도>로 돌아와 보자. '한국'은 더 이상 국가 공동체로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도'라 불린다. 그곳에서는 각개전투, 각자도생만이 살 길이다. 이 상황을 통해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생각해 이 상황을 이겨내는 <부산행>과 같은 긍정의 메시지일까, 아니면 더 절망으로 향하는 <서울역>과 같은 부정의 메시지일까?  

 여기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왔던 정석, 가까스로 생존한 정민의 가족들은 구원받는다. 모두가 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UN군에게. 그렇다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메시지일까?  혹은 정석이 누나와 조카를 구하지 못한 후회 때문에 철민과 정민을 구하는 장면을 통해 '죽을 때 죽더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부산행>과 <서울역>에 비해 <반도>는 영화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영화를 구성하는 장면, 그리고 감정을 비롯한 장면 속 세부 요소들의 존재 근거가 된다. 이러한 메시지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반도>의 몇 장면들은 그저 감정 유도만을 위한 '신파'로 느껴진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631 부대원들의 '숨바꼭질' 놀이처럼 이미지적으로 강렬한 시퀀스들도 그저 이미지로만 남게 된다. 그 인물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메시지와 장면을 통해 충분히 설득되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디테일의 아쉬움들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건 메시지다. 제목이 너무 좋아서 아쉬움이 더 큰 것일까? '대한민국'이 아니라 '반도'. 이름이 없어진, 그 이름으로 묶인 공동체가 와해된 상황, 목적과 기능으로 구성된 국가 단위 공동체부터 가족까지 모든 게 무너진 상황. 훌륭한 상황 설정을 바탕으로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도 아니고 한 문장으로 이뤄진 '주제'와 같은 '메시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가? 정말 중요하다. 선택과 조합이 본질인 영화의 특성상 그 선택과 조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판단 기준이 바로 그 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열연과 감각적인 이미지들 만으로도 영화는 성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그 이상의 단계, 화면을 뚫고 나와 보는 이의 삶에 무언가를 던져주기 위해서는 그 한 문장이 필요하다. 다름 아닌 <부산행>과 <서울역>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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