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레싱 - 19호실로 가다
지난달 말 제주도에서 엄마와 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이는 고작 3살, 엄마는 33살이라고 했다. 내 아들도 3살, 내 나이도 33살이다. 무엇 때문에 내 또래의 아기엄마가 내 아이와 같은 나이의 자식 숨을 거두게 하고 자신의 목숨도 버렸을까.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그럼에도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또 자식을 죽인 부모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할 때마다 저건 동반자살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한 사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아무리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존재가 부모라고 해도 그 생명을 다시 빼앗아갈 권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뉴스는 뭔가 달랐다. 사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판단보단 함께 아파해야하는 사건임을 알았다. 아이의 엄마는 왜 하필 제주도를 삶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했을까. 아이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을까. 마지막 끼니로 아이에게 컵라면과 우유를 먹인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바다를 향해, 아니 삶의 끝으로 걸어가면서도 추워하는 아이를 이불로 감싸 안은 건 마지막 모정이었을까. 아이의 남은 생은 고통밖에 없다고 확신한 엄마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을까. 자식의 목숨을 빼앗은 엄마라며 비판의 말만 쏟아내기엔 이 사건 뒤에 가려져 있을 모녀의 무겁고 고단한 삶을, 선택을 내리기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엄마의 심정을 차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소설 <19호실로 가다>에서 수전이 내린 선택을 보는 내 마음도 처음엔 비슷했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했지만 아내,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려 숨막혀하던 그녀가 결국 내린 선택은 자살이었다. 그녀가 느낀 고통이 무엇인지 이해하면서도 마지막에 내린 선택에 대해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던 걸까? 자녀들을 두고 꼭 떠나야 했던 걸까? 행복해질 방법은 정말 없었던 걸까? 하지만 곧 이런 질문들은 의미 없는 것임을 알았다. 타인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가 한 결정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과연 내게 있을까? 내가 그 고통을 감히 안다고,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뉴스의 대부분은 고통 받는 타인에 관한 소식이다. 구타를 당하고, 살해를 당하고, 사기를 당하고, 사고를 당하고, 거짓말하고, 고소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자극적일수록 클릭수가 높아지니 제목과 내용은 한없이 선정적으로 보도된다. 이 고통의 향연 속에서 진짜 고통 받는 ‘타인’을 제대로 만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고통에 공감하다간 내가 먼저 소진될까 두려워 어느 순간 ‘판단’부터 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 타인의 가늠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누군가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도 심드렁한 나를 본다. 내 또래의 엄마가, 내 아이와 같은 나이의 자식을 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뉴스에서조차 난 판단부터 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릴 때 사고로 엄마를 잃은 남편은 유독 부모나 자식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 힘들어했다. 이번 제주도 모녀사건도 그랬다. 그는 내게 아무 죄가 없는 아이는 마땅히 천국에 가겠지만 그 목숨을 빼앗은 엄마가 지옥에 가는 건 정당한 거냐고 물었다. 모녀가 세상에서 고통 받게 내버려둔 건 바로 신이면서 죽음 이후 둘을 그렇게 갈라놓는 게 맞냐고 물었다. 살인도 자살도 죄라고 믿는 크리스찬인 나로선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내가 믿는 신이 그 모녀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난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일을 해야함을 안다. 아파하는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고통 받는 이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 세상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을 순 없지만 그 일부분은 내 책임임을 인정하고 함께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삶을 버리는 선택이란 어떤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한없이 부끄러워하면서 말이다.
2018.11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