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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제 Mar 22. 2021

아빠

다시 만나.

어제 서랍을 정리하다 우연히 아빠의 사진들을 발견했다. 학창시절에 교복을 입고 잔디 밭에 앉아 찍힌 사진, 내가 10살 때 노래방에 따라갔다 함께 찍힌 사진, 엄마와 남이섬에 놀러가 둘이 함께 찍었던 사진처럼 눈에 띄는 몇 장의 사진들이 있었다. 


아빠는 참 못됐었다. 나를 한번 안아주지도 않았고, 다정하게 웃어준 적도 없거니와 어린 내가 실수로 숟가락이라도 떨어트리면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할 것 처럼 나를 쳐다봐 식사 내내 목구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돈도 잘 벌어오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다정한 것도 아니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고 항상 얼굴이 굳어 있었다.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만나 술이나 한 잔 해야 조금 웃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없다. 당연히 그리움의 대상 또한 아니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 날의 새벽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새벽녘이었고 아빠는 그 날도 거래처 사장 아저씨와 술을 마신다고 새벽까지 밖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아빠는 엄마와 함께 골프가방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다. 말이 좋아 공장 운영이지 벌이가 좋지는 못했다. 새벽이라 고요했던 탓인지 전화벨 소리가 유난히 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불을 켜며 전화를 받았고 그리고 또 몇 초 지나지 않아 찢어지는 듯한 울음을 토했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깼는데 내가 그 날의 새벽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은 엄마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들어본 적 없던 엄마의 오열이었다. 


엄마는 어리둥절한 나를 붙들고 대충 아빠가 교통사고가 나서 많이 다쳤대.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옷 입어 아가. 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내 작은아빠 부부가 차를 몰고 집 앞으로 우리를 태우러 왔다. 새벽녘에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뱃 속에 오장육부가 다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가는 길에도 엄마는 살았냐 죽었냐 질문을 반복하며 울었고 작은 아빠는 중환자실이라던가 영안실이라던가 하며 조급히 새벽길을 가르고 아빠가 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병원에 있던 영안실 앞에 내렸다. 


어떻게 장례가 진행되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는 하얀 상복에 머리에는 흰 리본이 달린 핀을 꽂고 있었고 연신 조문객들이 울며 다녀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아빠와 거래처 아저씨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고 그 길로 헤어졌으면 되었을 것을 아저씨가 살던 동네로 가서 한잔 더 하자는 통에 차에 올라탔는데 진탕 마신 사람이 똑바로 운전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새벽이라고 차가 없으니 방심하고 가던 도중 갓길에 세워져 있던 대형 덤프트럭을 보지 못했고 비틀거리던 차는 트럭을 피하려다 운전석 쪽으로 핸들을 돌리는 바람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빠가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들었다. 발인을 하던 날, 영구버스에서 관이 들어있는 뒷쪽에 앉아 나는 많이 울었다. 왜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눈물이 났다. 


그렇게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아빠를 떠나보내고 엄마와 둘이 되었다. 형편이 어려웠어도 현명했던 엄마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고와 질병에 대비해 들어 둔 보험이 있었고 그 보험금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그래도 입에 거미줄 치지 않고 때로는 부족하게 또 때로는 여유롭게 입고, 먹고, 공부하고 자랐다. 정말이지 아빠가 그리웠던 적은 없었다. 다시 살아 돌아오면 좋겠다 내지는 보고싶다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만큼 정을 주고 간 양반도 아니었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혼자 생각해보는 시간이 종종 생겼다. 


왜 아빠는 그렇게 무심했을까, 왜 아빠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을까. 아빠는 내가 싫었을까? 미웠을까? 고모들은 나와 2살 터울이 진 언니가 4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 상실감에 차마 겁이 나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언니와는 달리 나는 품에 안지도 예쁜 티를 내지도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짧게나마 내 인생에 존재했던 '아빠' 라는 사람에 대해 한없는 결핍만 있을 뿐이었다. 


아빠는 생선을 참 좋아했다. 물론, 고기도 좋아했다. 안타까운 것은 형편이 좋지 않아 그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먹어보지도 못하고 갔다는 것이다. 종종 생선을 구워 먹거나 생선회를 먹을 때 아빠 생각을 했다. 아빠가 참 좋아했던 음식인데 원없이 먹어보지도 못하고... 말 끝이 흐려지면 언제부턴가 눈 앞에 뿌옇게 흐렸다. 엄마는 니가 다 커서, 이제 철이 나서 그런거라고 했다. 지금도 굴비를 발라 먹을 때면 나는 쓴 맛이 난다고 내장이나 머리 쪽은 건드리지도 않는데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진짜 가시만 남기고 다 먹었겠지 하고. -진짜 그렇게 먹었다. 물론, 싸빠진 고등어도 어쩌다 횡재한 듯 먹었던 형편이었지만.-


내 가정이 생기고 나서는 '아빠' 라는 단어가 어느새 내 눈물버튼이 되었다. 한없이 가엾고, 안타깝고, 안쓰러운 청춘이라. 서른 넷에 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눈을 감던 순간에 아빠는 무얼 생각했을까. 무얼 보았을까. 어린 나이에, 그래서 어리숙했을 나이에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고 아빠가 된 남자가 알아야 뭘 얼마나 알고 잘해봐야 뭘 얼마나 잘할 수 있었겠나 하는 생각도 한다. 아빠는 여러모로 어설플 수 밖에 없었겠다 하고. 






어제 발견한 사진 속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 '아기염소' 였을 것이다. 그 때 한창 즐겨 부르던 동요였으니까. 그러다 그 옆에 있는 아빠를 봤는데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일렁였다. 그 사진을 한 두번 본 것도 아닌데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그렇게 무심하고 다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사진 속의 아빠는 내가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기염소를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은 종종 나를 슬프게 한다. 


혹시나 마음이 넓은 신께서 바람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하시면 아빠를 딱 하루만 돌려보내 달라고 빌고 싶다. 이 생각을 한 지는 몇 년 되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참 좋아했던 생선구이와 회, 그리고 푸짐한 고기요리를 한상 가득 차려주고 마주 앉아 소주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상상. 그리고 아빠의 애창곡이던 '흙에 살리라'를 흐리멍덩한 발음으로 노곤하게 불러보는 것이 바람 중에 하나다. 상상일 뿐이라도. 


아마 아빠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을테니 배울 기회도 없을 것이다. 다음 세상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다시 한번 나의 아빠로 태어나 그 때는 이번에 못했던 많은 일들을 모두 했으면. 꼭, 다시 만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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