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이 Jan 29. 2024

이 또한 트렌드

내신 맛집을 찾아서

학창 시절을 통틀어 나는 딱 한 번 전학을 간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3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학교를 옮겨버렸다.

그때 당시 다니던 학교의 학생부장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도 미치광이에 가까울 정도로 말도 되지 않는 교칙들로 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 선생님은 학교 근처에 살고 계셨는데, 시험이 끝나고 일찍 하교한 날에도 자유로운 모습으로 학교 밖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머리를 풀고 있거나(머리를 반드시 묶는 것이 교칙이었음), 발목 양말을 신고 있으면(반드시 복사뼈를 완전히 가리는 장양말을 신는 것이 교칙이었음) 학교 밖에서도 서슴치 않고 학번을 적어 교칙 위반으로 징계를 내렸다. 그 선생님은 이러한 엄격한 교칙으로 아이들이 멋 부리는 데에 관심을 끄고 공부에 좀 더 집중하기를 바란 것 같지만, 그 당시 우리는 이건 교칙 위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 때문에 공부에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억울한 사유로 징계를 받은 학생의 부모님이 학교를 찾아와 큰 소리가 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었고, 꽤 모범적이었던 나 또한 몇 번의 벌점이 누적되어 학교 생활이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다.

나는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 몇 명이 있는 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 당시 전학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사 또는 부모님 중 한 분이 군인이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학을 꺼려하고 한 동네에, 한 학교에 오래 머물고 싶어했다.

그땐 그랬다. 전학을 가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고 왕따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난 전학을 감행했고, 다행히 더 좋은 선생님들과 더 좋은 친구들을 만나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교단에 있어 보니, ‘전학’에 대한 인식이 참 많이 바뀌어있어 놀라웠다.

아니 인식이라기 보다는 전학의 목적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어느 선생님께서는 이게 요즘 트렌드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했다.

2학기에 내가 본 전학생만 해도 5명이 넘었다. 2학기 중간고사 일주일을 앞두고 매우 애매한 시기에 전학을 온 학생도 있고, 2학기가 다 끝났을 때 전학 온 학생도 있고, 그 시기와 사유가 20년 전의 나였다면 절대로 상상할 수도 없는 전개였다.

용감한 전학을 감행하는 요즘 아이들의 이유는 대부분 이러하다.


오로지 수능만이 대학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고1부터 고3 1학기까지의 내신 성적을 모아모아 대학에 진학하는 시대가 되었다.

1년에 총 4번의 중간/기말고사가 있기 때문에 입시에 적용되는 총 시험의 수는 8~10번이 된다. 단 한번의 기회로 대학을 갈 때보다 부담이 덜 해졌다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입시 세계는 더 더욱 치열해졌다.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만회할 기회도 주어졌다는 뜻이고, 이 때문에 학생들은 만회할 기회를 찾아 ‘전학’을 감행한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가구들이 모여있는 곳의 학교는 그만큼 성적 다툼도 치열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남 같은 곳 말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너무 많이 몰려 있는 학교에서는 내신 성적을 받기가 힘들다. 타 학교에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학생도 이 학교에서는 중간 정도의 성적 밖에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억울하다면 상대적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적게 모여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 이게 바로 요즘 전학의 목적이 되었다.속된 말로 ’내신 맛집‘을 찾아 학생들이 ’전학‘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학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요즘 세태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학구열이 좀 낮은 지역을 좇아 고등학생 임에도 불구하고 자취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 경악스러우면서도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최근 의대 정원을 늘린다는 소식에 ‘의대 진학‘을 위한 전학이 상당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를 옮겨다니며 자신의 성적을 만들어내 의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이 젊은이들에게 내가 과연 해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이러한 비정상적인 세태를 만들어 낸 데에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 없다고 과연 말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잘못 되었다고 과연 비난 할 수 있을까?


아직 대학을 가려면 한참이 남은 이제 갓 50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지만, 벌써부터 걱정이 되어 문득문득 간담이 서늘해 질 때가 많은 요즘이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더 따뜻해지기 보다는 더 각박해질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 마음이 따끔해진다.

때로는 이런 저런 뉴스를 보다 염증을 느껴 이민이나 확 가버릴까라는 생각도 요즘들어 부쩍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이민을 간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탈출구를 찾고자하는 진지한 고민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찾지는 못했으나,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엔 이런 트렌드가 없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나의 학생들을 대하고 있다.

적어도 나의 ‘한 때’ 제자였던 아이들은 좀 더 순수하고 좀 덜 냉혹한 세상을 만들어가길 온 마음을 다해 바라고 바라며 말이다.

지금 이 격변의 시기에서 쉬이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가득 담아 말이다.

이제 전학을 갈, 또는 전학을 올 학생들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할 지 또 하나의 숙제를 끌어안으며 이 트렌드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2023년, 나의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