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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Nov 11. 2022

영숙’s answer. 방 한 칸 부엌 한 칸 복작복작

엄마 인터뷰 17차__Q. 첫 독립생활은 어땠나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5살 때쯤의 기억이다우리 가족은 강화군 송해면의 어느 주택 단지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이 있었고주인집의 측면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작고 아담한 문짝이 있었다그 문짝 안에 단칸방과 단칸 부엌이 딸린 우리 집이 펼쳐졌다일곱 살 쯤에는 방이 두 칸인 집으로 이사를 갔으니까이 글에 따르면 엄마와 아빠의 작은 집 생활은 한 육-칠 년 정도 이어졌나 보다.              




Q. 엄마결혼 직후의 생활은 어땠어?     

          




어제저녁에 너희 아빠랑 치맥을 즐기며 축구 중계를 봤어. FIFA 랭킹 1위인 브라질과의 초청 경기였고 세계적인 스타 손흥민과 네이마르가 뛰었지. 1대 5로 졌는데, 김민재 선수가 부상으로 뛰지 못해서 아쉬웠어.  


  

 


이렇게 축구를 좋아하게 된 건, 결혼 후 첫 살림을 꾸렸던 진해 경화동 월세방에서였어. 83년 멕시코에서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가 열렸는데, 4위라는 성적을 낸 거야. 그 당시는 꿈같은 일이었지.     


나중에 하는 말들이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느니, 체벌이 있었느니.’ 했지만, 국제무대에서 항상 체력 부족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만 늘어놓던 때에, 박종환 감독은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준 영웅이라 할 만했어. 그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지.     





경화동 집은 주인집에 딸린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으로 이뤄진 셋방이었어. 한 달에 3만 원씩 월세를 냈지. 주인은 군무원인 아저씨와 상냥하고 여성스러운 아주머니셨는데, 유치원에 다니기 전인 딸과 아들이 있었지.     

방은 거실이자 옷방이기도 했고, 부엌은 현관과 보일러실, 빨래터를 겸해서 사용했어. 부엌이 가로 3미터, 세로 1.5미터 정도의 크기였던 것 같아. 그래도 널찍했어.     


방에는 작은 장롱과 컴퓨터만 한 흑백 TV와 밥상이 있었고, 부엌엔 작은 찬장 하나와 곤로와 세숫대야 하나와 다라이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지. 난방은 연탄으로 했어. 그 불로 난방도 하고 밥도 해 먹었지.     





반찬도 만들어야 하고 당장 김장도 해야 했어. 조그만 요리책을 샀어. 쳐다보면서 반찬 만드는걸, 아빠 동기생 부인이 본 거야. 모임이 있을 때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사람들한테 말하곤 했지. “내가 갔더니, 글쎄 책 보면서 반찬을 만들고 있는 거야.”라고.     


그리고 김장을 하려고 배추를 사러 나갔는데, 시기가 늦어 배추가 별로 없더라고. 그나마 골라서 사 왔는데, 그걸 보고는 “어휴, 이런 걸 사면 안 돼.” 그러더라고. 겉잎이 하나도 없는 걸 나는 깨끗하다고 샀거든. 그런데 겉잎이 다 상해서 뜯어 버린 거니까, 신선도가 낮다는 거지. 그리고 김장 김치는 겉잎으로 싸 둬야 하기도 하고….     


그 아줌마는 오며 가며 들려서,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고 끝없이 가르쳤어. 웃으면서 차근차근 부드럽게 말을 하는데도 그 당시는 왜 그렇게 싫던지.     





그렇게 살던 중 너를 낳았는데 할머니도 다녀가시고 외할머니도 다녀가셨어. 삼칠일이 지나자 아빠 동기들 부인이 찾아오곤 했어. 미역국도 한 솥 끓여놓고 가고 그랬는데, 한 번은 너는 방 안에 있고 너를 보러 온 아줌마와 엄마가 부엌으로 나왔어.     


무언가 이상해서 연탄불을 확인하려고 했어. 그 아줌마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고 엄마가 연탄불 뚜껑을 열었는데, 그 순간 엄마가 반사적으로 밖으로 뛰쳐나간 거야. 그러자 그 아줌마가 다급히 방으로 들어가 너를 안고 나왔어.     





나중에 ‘어떻게 아기를 놔두고 저 혼자 살겠다고 뛰쳐나가느냐?’하고 소문을 낸 거 있지? 연탄가스가 왈칵 코로 들어와, 아무 생각도 없이 몸이 반응해서 뛰쳐나간 건데, 말이 안 되는 걸까?     


가스 문제가 있었으니 방을 손봐준다고 하셨는데, 시멘트를 바르고 마를 동안 있을 곳도 마땅치 않고,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해서 이사를 했어.     





그러고서 얼마 전, 코로나가 퍼지기 전에 아빠랑 엄마랑 진해에 갔었어. 아빠가 매일 오르던 산도 가보고 살던 곳도 가보자고 해서, 경화 초등학교까지는 찾아갔어. 도시의 외곽, 어느 읍 소재지의 상가 길 같은 평범한 곳이야.


눈에 그리던 곳인데, 별로 변한 거 같지도 않은데, 조금 달랐어. 찾을 수가 없더라. 아빠가 가끔 안부 전화를 하곤 해서 주인집 아저씨 전화번호가 있었어. 전화를 했더니 집을 팔았다고, 그리고 그 집을 허물고 새로 짓고 있다고 하셨어.     


이사하신 아파트로 찾아갔지. 40년 가까이 지났는데, 주름살만 좀 있지 옛 모습 그대로였어. 우리도 반가웠지만 그분들도 무척 반가워하셨어. 한쪽 벽에는 가족사진과 애기들 돌 사진이 걸려 있었고. 아주머니께선 친구들과 외국 여행을 다니시며 즐겁게 살고 있다고 하셨어.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왔네.    

 

‘옛날에 살던 그 집이 남아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십여 년 전진해에 다녀왔다. (다녀왔다고 하기는 좀 그런가?) 마산에 사는 친한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경치 좋은 터널이 있다고 해서 따라나선 길이었다거기서 진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종용과 영숙은 진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어렴풋한 기억조차 없는 그곳을 바라볼 때나에겐 어떤 애틋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 Behind     

외할아버지가 백날천날 축구를 보셨는데,

어렸을 때는 축구를 안 좋아했어?

그때는 학교 다니느라 일과가 바빴지.

축구를 자주 중계해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해 살 때 축구를 좋아하게 됐구나?

그때 맛을 들인 거지.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이 빛을 못 보던 시절이었거든.

아시아에서만 조금 하는 정도였고.

유럽이나 외국에 나가면 형편없이 깨지고

골 한 번도 못 넣던 때였잖아.

근데 세계대회에서 4등을 하니까 얼마나 재밌어.

그래가지고 축구를 보게 된 거야.

엄마, 근데 엊그제 일본한테 대패했더라?

그래? 엄마 못 봤다.

다행이네.ㅋㅋㅋ     


난 엄마도 곤로를 썼는지 몰랐어.

곤로 썼어.

엄마는 가스렌지로 시작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시대였구나.

그런 시대였지.

곤로는 화구가 하나뿐이잖아.

밥도 하고 국도 하고 반찬도 하고

온종일 걸렸겠어.

아니야. 연탄도 있었잖아.

연탄?

연탄불도 화로로 썼어.

아차. 그럼 화구가 두 개네?

그렇지.

불 두 개짜리 가스렌지나 다름이 없었네?

응,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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