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정말 오랜만에 하나의 드라마에 푹 빠져 끝까지 봤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도 않고, 끝까지 보는 것은 인생에서도 손꼽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드라마를 끝까지 봤을까? 아니 시작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나는 왜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을까?"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은 구씨(손석구)가 늘 가만히 혼자 술 먹는 장면 때문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구씨가 아무 말없이 매일매일 집 앞 평상에서 혼자 술 먹는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고 궁금했다.
"낮에는 이쪽 창문 보면서 한잔 마셔"
"해질 때는 저 베란다 보면서 딱 한잔 마시고"
"밤에는 또 저쪽 창문 보면서 또 한잔 마셔."
"각도만 바꿔가면서 가만히 부동자세로."
- <나의해방일지>, 3화 중 두환의 대사
무엇이 그를 외딴 시골에서 한없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게 만들었을까? 과연 그는 무엇에서 해방하고 싶었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구씨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나에게도 그렇게 술잔을 홀로 기울일 수 있는 평상이 있었으면,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도 커져갔다.
그 답이 궁금해 드라마를 계속 보았지만 좀처럼 이유가 나오진 않았다. 그 이유를 기다리며 드라마를 보다 보니 다른 캐릭터들도 보였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급박한 전개나 반전보다는 잔잔하게 그들의 일상이 이어지는 묘한 매력으로 <나의 해방일지>를 계속 보게 되었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처럼 모든 캐릭터들은 각자는 나름대로 어떤 억압에서 벗어나려 했다. 구씨는 '죄책감', 염미정은 '보통의 삶', 언니는 '사랑', 남동생은 '차'. 그들이 각각 바라는 것들은 시점과 상황에 따라 바뀌기는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갈망은 억압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그것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에리히 프롬의 말들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어떤지를 생각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원하고, 어른이 되면 더 많이 출세하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이리 저리 여행을 다니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에 미친 듯이 열중하다가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하면 이런 의문이 떠오를지 모른다. " 만약 내가 이 새 일자리를 얻으면, 내가 더 좋은 이 차를 사면, 내가 이 여행을 하면, 그다음엔 무얼 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모든 걸 원하는 게 정말로 나일까? 내가 지금 추구하는 목표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거기에 도달하자마자 나를 피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일단 제기되면 무섭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떠받치는 토대 그 자체, 즉 그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느냐고 그 자신에게 묻기 때문이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p273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 Erich Seligmann Fromm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적학자이다. 국내에서는 <사랑의 기술>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는 1941년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나의 해방일지>의 내용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우리는 늘 자유를 원하며 살고 있다. 시간적 자유, 경제적 자유, 선택적 자유와 같은 다양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며 살고 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이 그 자유에 대한 갈망과 함께 한 가지 의문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과연 그것을 이루면 나는 행복할까?" 그것만 이루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시간이 흐르고 인류는 과거의 어떤 때보다 자유를 누리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러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세상은 안정되고 할 수 있는 것은 많아지지만 그 안의 개인들은 갈수록 고립되고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드라마에서의 각각의 캐릭터 안에서 더 단단하게 해방에 대한 욕구가 커져갈수록 각 캐릭터들의 불안감은 높아진다. 나의 해방일지 OST인 '헨'의 <푹>이라는 노래처럼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푹 빠져있다. 그리고 각각 그 해방의 어떤 지점에 이르러 그 원하던 지점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동생은 그토록 원하던 멋진 차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언니는 바라던 사랑이 늘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미정은 평범하고자 했던 일상이 꼭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얻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을 드라마가 주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맨 마지막이 아닌 초반에 더 먼저 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삶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남들보다 조금 먼 집으로 향하는 길이 그들의 해방을 꿈꾸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나? 그래서 지루하도록 멀었던 집이 서울로 옮겨지고 드라마가 끝난 것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도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해방을 원할까? 행복하길. 더 멋진,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나의 하루가 의미가 있길. 그러한 욕망이 오히려 나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내가 <나의 해방일지>를 끝까지 보게 된 이유는 무던한 듯 절실한 그들의 잔잔한 일상이 나에게 던진 자유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언젠가 글에서 본 내용인데 사람이 사막에서 죽는 이유는 피로와 갈증도 있지만 모든 방향으로 똑같이 한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 압도와 공포로 인해 죽는다고 한다. 불확실하고 무한한 자유는 우리를 해방하기보다는 어쩌면 더 구속할 수도 있다.
드라마를 모두 보고 그 여운에 이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드라마가 좋았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 기억을 노래와 함께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tAVLh96Dz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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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 JTBC, <나의 해방일지>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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