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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채기 Aug 15. 2023

동굴 (서사시)

동굴로 들어가자.

삽이랑 이불을 들고 동굴로 들어가자.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또 땅굴을 파고 들어가자.


더 안으로

더욱 밑으로

더욱더 깊숙이 들어가자.


추우니까 이불 속으로도 들어가자.


나올 때를 대비하지 말라.

그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그런 허풍쟁이에게서 달아나는 중이 아니었던가.


멋쟁이가 감히 오지 못할 곳으로.

빛쟁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도착했다.

칠흑에

도달했다.

혼자에


어두운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

이곳이 어두운 구석이니까.


여기에는 규칙조차 살지 않는구나.

기준도 기대를 데리고 도망갔구나.


평가가 굶어 죽었다는,

판단이 심판에게 잡아먹혔다는,

심판은 식중독으로 죽어버렸다는 낚싯배.

그 낚싯배만이 덩그러니.

심판이 쓰고 있던 왕관만이 배 위에 덩그러니.


그 배를 타고 노를 젓는다.

선악의 시체들이 노에 자꾸만 걸린다.

하지만 닿는 즉시 으스러지니까 개의치 말자.

도덕도 여기선 귀신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자.


여기서 왕관을 쓴 자는 결국 누구던가?

더러워 말고 그 왕관을 냉큼 쓰거라.


아 이것이 권력인가?

나, 이 굴의 왕.

이불을 뒤집어쓴 신.


내가 히죽대자,

물밑에서 흉측한 손이 튀어나왔다.


힘이 센 손이 물었다.

"너는 누구의 왕이냐? 너는 무엇을 관장하는 신이더냐?"


나는 아파하며 물었다.

"나한테 왜 그러시오!"


잔인하게 파고드는 손톱이 대꾸했다.

"백성 없이 어찌 왕이 있고, 일없이 어찌 신이 있을까?"


나는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여기서 살아있는 건 그대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나는 너의 왕이다! 나는 너를 관장하는 신이다!"


무례하게 잡아당기는 팔이 대답했다.

"삽을 든 분이여! 이제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근엄하게 대답하자.

왕관을 쓴 자답게, 이불을 두른 자답게.


"당연하지! 너는 내 트라우마다!"


물에 빠지면 추락이다.

저기엔 넓이도, 높이도 없으니까.

오직 깊이만 있으니까.


"복종하라! 나 스스로 있는 자, 홀로 존재하는 자인 나에게! "


늙은 손목이 자신을 구부리며 물었다.

"저는 언제나, 영원히 당신과 함께합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히죽인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오라! 크림을 바르든, 반지를 하든, 색을 바르든, 일단 예쁘게 하고 오라."


그녀가 다시 등장했을 때, 나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명령했다."춤추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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