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돼서야 아이바는 자신이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그렇다고 잘 챙겨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라면 남은 게 있었는데..."
물이 끓는 동안 아이바는 유튜브를 뒤적거린다.
유익한 영상을 찾는 중이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했다.
그녀는 웃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예능이나 보면서 피이식 웃었다간 오늘 밤 손목을 긋고 말거다.
맘에 드는 과학 관련 영상을 막 발견했을 때,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물이 끓어 넘친 것이다.
아주 작은 냄비였다.
"앗 뜨거!"
뚜껑을 열려고 했던 손가락이 빛의 속도로 축축한 입속으로 도망갔다.
어쨌든 라면이 완성되었다.
아이바는 완성된 라면을 앞에 두고 자신의 손가락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내가 뜨겁다는 인지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반응했지? 이건 누구의 트라우마지?"
그녀의 DNA 속 누군가 대답했다.
"불에 데어 죽을 뻔했던 나의 트라우마지"
"누구신데요?"
"그냥 지나가던 한 영장류라고 해두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기 전, 정말 정말 오래전에 살았던..."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아이바의 손가락은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바로 그 순간 아이바는 자신이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무런 카톡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 사실은 아이바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왜케 불안하지? 왜 이렇게 괴롭지? 이건 누구의 트라우마지?"
"부족에서 쫓겨난 뒤 죽을 뻔했던 나의 트라우마지"
"누구신데요?"
"그냥 지나가던 수렵채집인이라고 해두지. 문명도 있기 전, 정말 오래전에 살았던"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그녀는 라면을 한 입 먹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별로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왜 라면을 끓였지?
뭔가 한 끼도 안 먹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야.'
아이바는 같은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누구의 트라우마지?"
"굶어 죽을 뻔했던 나의 트라우마지"
"누구신데요"
"그냥 여기 한반도에 살았던 한 인간이라고 해두지. 라면도 없이 가난했던, 오래전에 살았던…."
일단 끓였으니까 남기지 말아야지.
음식물 쓰레기는 귀찮으니까.
아이바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라면을 전부 입안에 갖다 버렸다.
그제서야 아이바는 자신이 동영상을 전혀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기 있는 과학 강사의 목소리가 에어컨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듣지도 않을 거 왜 이렇게 열심히 찾았을까?
뭔가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죄책감이 들어."
아이바는 또 똑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누구의 트라우마지?"
아이바는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닥쳐 엄마, 나도 알아, 이건 엄마의 트라우마지."
아이바는 피이식 웃으며 말했다.
"공부 못해서 인생이 꼬였다고 믿는 우리 엄마의 트라우마지"
아이바의 머리에 섬뜩한 명제 하나가 떠올랐다.
"트라우마는 유전된다."
그제서야 유튜브 과학 강의가 들리기 시작했다.
재밌는 상황이 제시되었다.
문명이 무너지고 모든 지식이 손실되었다고 한다면?
그런데 딱 한 가지 지식을 인류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위대한 과학자 파인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바는 그만 피이이식 웃고 말았다.
"아닌데... 모든 것은 트라우마로 이루어져 있는데."
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