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스핑크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채기 Dec 29. 2023

첫 번째 스핑크스

왜 철학을 복수전공 하는가?

첫 번째 스핑크스


 그렇게 저는 첫 번째 스핑크스를 만납니다. 부담스러운 얼굴로 "왜 철학을 복수전공 하는가?"라고 묻더군요. 대답하지 못한다면 복수전공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수전공은 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저는 나름대로 대답을 찾았습니다. 저의 대답은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 그리고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영화와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친구와 이른바 '철학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히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철학과에 진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별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과 과목을 더 좋아하는 이과생이었습니다. 이공계로 대학가기가 더 수월했고 철학은 혼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상상과는 달랐던 대학 생활이 저를 고민에 빠지게 했습니다. 소프트웨어 공부가 적성에 맞는 건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정말로 나의 진로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확신 없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쉽지 않았죠.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막연한 질문만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예측하고 조언하는 책입니다. 하라리는 책에서 놀라운 조언을 하나 합니다. "지금까지 시장 가치가 크지 않았던 철학자의 기량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미래에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궁금하시면 책을 강력 추천합니다) 배고픈 철학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저자의 예측이 맞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틀릴 확률이 더 높겠지요. 그러나 저명한 한 학자의 예측은 제가 철학을 복수전공할 좋은 핑계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저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다중전공은 해야 하는 데 확신도 없는 공부를 2개나 하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고 싶은 철학을 할까 고민했지만, 미래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게 나쁘지 않다면? 나쁘지 않은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겠다. 그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스핑크스에게 대답했죠. 나는 미래에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그리고 나쁘지 않은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그렇게 무사히 첫 번째 스핑크스를 뒤로하고 저는 철학 복수전공생이 되었습니다. 


철학 복수전공생


 복수전공생의 삶은 만족스러웠습니다.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순수하게 궁금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언제부턴지 저는 공부의 쓸모를 묻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영어를 이해하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영어 성적을 이력서에 집어넣기 위해 공부하죠.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소프트웨어를 공부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업이 요구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공부하죠.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며 순수한 호기심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적 인간학" 수업을 들으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스피노자, 다윈, 니체를 공부했습니다. 스피노자를 어디에 사용할지 따위는 몰라도 좋았습니다. "정치철학"을 수강하며 자유를 외치던 제가 평등에 대해 주의하여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을 신봉하던 제가 "과학철학"을 들으며 과학에 의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질문이 와닿지 않는 수업도 있었습니다. 그런 수업은 정말 피곤했습니다. 철학에는 많은 분야가 있지만 각자가 나름의 진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진지함에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쓰기


 철학과 수업의 특징을 한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글쓰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철학 글쓰기는 제 예상과 달랐습니다. 저는 깊은 뜻을 담은 심오한 문장을 써야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철학과에서의 글쓰기는 논증하는 글, 즉 논리적인 글쓰기였습니다. 논리적인 글을 쓴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소프트웨어 전공에서 역시 논리적인 글쓰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라는 요리사에게는 아주 논리적인 레시피를 작성해서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코딩 역시 논리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를 배우고 논리적인 글을 쓴다는 점이 본 전공과의 가장 큰 공통점이었습니다. 철학과에서 글을 쓰다 보니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생각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논리 정연하게 생각하고 효과적으로 전달까지 할 수 있는 능력,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철학 논술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소규모 인원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서로의 글을 피드백하고 토론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가장 활기차고 흥미로운 수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슷한 수업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물론 다른 수강생들과도 생각을 나눌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글을 피드백하는 활동은 어떨까요? 그 피드백이 토대가 되어 토론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