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귀신이란 것도 왠지 없을 것 같다. 점이나 사주도 본 적 없다. 이런 것들을 믿지 않는 나만의 철벽 같은 논리가 있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초록이가 읽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초록이가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도. 초록이는 내 방 한편에 놓인 작은 식물의 이름이다. 내 무릎 높이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황토색 화분에 담겨 있다. 초록이는 6년 전에 처음 나를 만나서 꿋꿋이 살아남고, 살아가고 있다.
이사 선물로 초록이를 선물한 건 엄마였다. "우주에서도 안 죽는 애래. 잘 키워봐." 엄마가 우연히 본 어떤 기사에는 우주에서 생명체를 기르는 실험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식물 대표로는 스파트필름이라는 식물이 뽑혔다고도 했다. 물을 잘 주지 않아도, 빛이 충분하지 않아도 쉽게 죽지 않는 생명력 때문이었다. 화분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나에게 엄마는 스파트필름을 선물했다. 나는 그 이름이 조금 어려워서 초록이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금방 죽어도 또 다른 화분을 들여와서 초록이라고 이름 붙여주면 되겠지. 식물들은 전부 초록색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초록이를 신경 쓰기에 나는 조금 바빴다.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를 쫓아다녔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싫었다. 이미 다 알고 그래서 재미없는 것들. 그런 것들은 이사오기 전부터 있던 벽지 얼룩처럼, 눈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이내 투명해졌다. 그때의 내 주위 많은 것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나를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눈에 띈다. 엄마가 갑자기 입원했을 때가 그랬고 초록이가 잎사귀를 바닥으로 축 늘어뜨렸을 때도 그랬다. 어느 날 눈을 돌려보니 구석에 놓인 초록이가 반쯤 변색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민망할 만큼 못볼꼴이었다. 물을 주지 않은지 두 달 정도 된 것 같았다. 초록이가 새로운 초록이로 교체될 때가 된 걸까... 내다 버리기 전에 혹시나 싶어 물을 줘봤는데, 샤워기 밑에 십 분쯤 두고 나니 신기하게도 금방 제 모습으로 돌아갔다. 초록이는 항상 그랬다. 이제는 정말 죽은 게 틀림없다고, 이건 결말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이 들 때에도 물만 주면 살아났다. 끊임없이 내 무관심에 저항했다.
초록이는 그렇게 내 옆을 꿋꿋이 지켰다. 내가 느꼈던 슬픔과 좌절, 혼잣말로 내뱉었던 짜증과 욕설, 잦고 허황된 여러 결심과 단념들. 그것들을 함께 보고 견뎠다. 나는 초록이와 달라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했는데, 그런 걸 충분히 받지 못할 때도 초록이는 옆에 있었다. 우리는 호흡으로 묶인 관계였다. 같은 방 안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성실하게 주고받는. 그리고 이런 관계에는 어쩔 수 없는 관심과 애정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초록이에게 물을 주는 날이 늘었다. 초록이는 규칙적인 식사를 하더니 더 푸릇해지고 건강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도 조금 자란 것 같았다.
초록이가 이 일기를 읽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잦은 나의 무관심 속에서도 변함없이 푸릇한 나의 하나뿐인 식물에 대한 글을. 그래서 혹시 모를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초록이가 사라진다면 조금 많이 허전할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초록이 덕분에 내가 그만큼 덜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초록이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어쩌면 나는 이런 관계들, 그러니까 내가 책임져야 하는 관계들을 좀 더 많이 만들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삶은 그렇게 서로 얽히고 얽힌 인력의 힘으로 살아가는 건가. 초록이와 내가 밤낮으로 주고받는 이 기묘한 호흡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