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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과학자 Jul 03. 2022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방법

[서평] 악의

'인간을 묘사(描寫)한다' 
- 악의, 391p -


문학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인간을 묘사한다'는 표현이 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이다. 인물에 대한 장황한 설명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물에 대한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전달함으로써 상대방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첫인상'이라는 말과도 결이 닿아 있다. 첫인상이란 상대를 처음 보았을 때 형성되 '이미지'를 말한다. 첫인상이 미치는 효과를 초두효과(Primary effect)라고 부르는데, 인상이 험악한 사람은 성격까지 험악할 것이라는 오해가 그 예에 해당한다.


'이미지'는 상대를 바라보는 '렌즈' 또는 '필터'로 작용된다. 왜곡된 편견이 우리의 의식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 말에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특히,  이성적 판단을 한다는 자신감에 도취된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사기당하기 가장 쉬운 사람이 스스로 '잘났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는 아니지'라는 그 속마음이 들린다면...


일단,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한번 읽어보라. 사람에 대한 품성이나 모종의 편견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설계되어 나를 조종할 수 있는지 오싹해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악의'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쫓고 쫓기는 두뇌 게임을 그린 추리 소설이다. 인기 소설가 히다카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가가 형사는 히다카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노노구치의 범행임을 쉽게 밝혀낸다. 그러나 가가는 살해 동기를 밝히지 않는 노노구치에게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결국, 가가의 집요한 탐문과 조사를 통해 두 친구의 과거가 밝혀지고, 노노구치가 쓴 '고백의 글'을 통해 감춰져 있던 진실이 드러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중반쯤 된다. 딱 여기까지 읽고 나면, 소설 '악의'가 자칫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통속적인 추리 소설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점은 노노구치가 쓴 '고백의 글'에 숨겨져 있다. 독자는 죽은 자의 항변을 들을 수 없다. 그저 노노구치의 '고백의 글'을 통해 죽은 자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고백의 글'에는 죽은 자에 대한 '이미지' 조작이라는 '특별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 고양이를 죽였다고. 독 경단을 정원에 뿌렸었어. 설마 그게 그렇게 잘 먹힐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 악의, p. 19 -


노노구치의 '고백의 글'에는 히다카가 고양이를 죽인 일화가 소개된다. 얼핏 이번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듯 하지만, 이 글에는 깊은 의미의 트릭이 숨겨져 있다. 히다카의 나쁜 '이미지' 조작이라는 목적이 심겨 있었던 것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고백의 글'을 통해 히다카라는 인물의 잔혹성을 묘사해서 일종의 선입견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입견은 노노구치가 자백한 범행 과정과 동기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공감마저 일으키게 된다. 노노구치의 '고백의 글'이 범행의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부인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잘 짜인 노노구치의 시나리오에 따라 사건이 마무리돼간다. 하지만 가가 형사의 조심성과 특유의 '두드림'으로 꽁꽁 숨겨졌던 범행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가가 형사는 노노구치의 '고백의 글'을 통해 밝혀진 명백함에 도 불구하고, 동료들이 만류하는 무료한 탐문 수사를 지속했다. 사소한 절차라도 건너 띠지 않으려는 특유의 성실함 때문이었다. 그렇게 히다카를 기억하는 현재, 그리고 과거의 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에게 히다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물론, 모든 이들의 기억과 표현이 하나로 일치되지 않았다. 같은 상황이라도 그 해석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가 형사는 작은 의구심을 품게 된다. '혹시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이 자칫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를 진실을 밝혀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가 형상의 조심성을 '두드림'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풀어쓸 수도 있겠다. 




소설에 대한 더 이상의 스포는 하지 않겠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미지'라는 것의 무서움을 말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 '이미지'라는 말은 '프레임'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정치 기사를 읽다 보면 '프레임 씌우기'라는 말이 여럿 등장한다. 최근 '이준석 성 비위 사건'도 그중 하나이다. 한쪽에서는 '성 비위 사건' 자체가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그 반대쪽에서는 '권력 싸움'이 이 논란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황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이 논란에서 양쪽 정치인들은 이미 '프레임'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소모되는 사람들은 순진한 대중 들일뿐이다. 정치인들의 말을 통해 깊숙이 심긴 선입견에 따라 주장을 관철하며 움직이는 사람들. 점점 강화된 편견으로 서로의 주장만을 소리치는 티비속의 저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니  '이미지' 또는 '프레임'이라는 것의 무서움에 다시금 오금이 저려온다. 


소설 '악의'를 빌어 서술했듯, '이미지'의 힘은 막강하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프레임'은 우리가 사는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또한, 그것의 등에 엎고 조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턱 막히는 듯하다. 물론, 그 무서움을 인지하자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소설 '악의'의 가가 형사가 보여 줬던 '두드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현실 세계에는 나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는 장치들이 너무도 많다. 수많은 말과 글, 그리고 유튜브라는 매체들은 소위 순진한 우리들을 하염없이 공격하고 강화한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러니 괜한 자만심과 자뻑은 그만 지양하고, 계속 확인하고, 들어보고, 읽어봐야 한다. 다양한 관점의 책을 읽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렇게 계속 '두드리며 나아가야 한다' 말이다.


'악의' 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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