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ra Seed Feb 28. 2023

집에 갔는데, 집에 가고 싶었다.

결혼 십 년 차, 부부가 유학을 왔습니다.

집에 갔는데, 집에 가고 싶었다.


부다페스트로 유학 온 지, 벌써 1년 하고 6개월.

석사 3학기가 쏜살같이 지나갔고, 동유럽식 스파르타 강의에 지친 나와 남편은 아마도 향수병 비슷한 무언가에 걸려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 친구들, 한국어, 한국 음식 등 한국적인 무언가가 그리웠다. 그렇게 지난 1월 우리는 짧은 겨울방학 동안 2주 동안 서울에 다녀왔다. 모국에 가는 것이니, 여행이라기보다는 집에 다녀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런데, 집에 가는데 머물 곳이 없었다.

서울에는 더 이상 우리 집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마주하고 잠시 호텔에 머물까 생각을 했다. 2주 치 호텔 값은 만만치 않았고, 서울에서 호텔 신세라니 뭔가 조금 낯설면서 우울했다. 시댁이나 친정에 신세를 지는 것을 무엇보다 꺼려하는 우리 부부였지만, 어쩔 수 없이 친정 신세를 지게 되었다. 친정 부모님은 시골에 작은 집을 짓고 일 년에 반 이상을 머물고 계신다. 원래 서울 집에는 남동생 부부가 사는데, 사정 상 올케와 조카가 잠시 제주도에 머물고 있고 남동생만 서울 집에 있다고 한다. 로펌 파트너 변호사인 남동생의 일과는 보지 않아도 바빴고, 집에는 잠만 자러 늦은 밤 혹은 새벽에 들어온다고 하면서 친정 엄마는 빈집이나 다름없으니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물론, 엄마는 우리의 도착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뛰쳐나올 기세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딸과 사위가 유학을 갔고, 코로나 때문에 왕래도 못하다가 근 2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되니 버선발로 뛰어나오지 않을 엄마가 어디 있을까?


매정하게 들릴 테지만, 나는 그러는 엄마를 만류했다.

시골집에 계시라고. 계시면 서울에서 일정 마치고, 곧 내가 내려갈 테니 사흘만 참고 계시라고 부탁드렸다.

가족에 관해, 결혼 후 내가 깨달은 것은 현재 내 가족은 '남편과 나'라는 것이다. 친정 부모님과 친정 식구들은 결혼 이전에 내 가족이고 이제 모두 출가한 상태에서 각자의 가족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친정이나 시댁이나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서로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며 거리를 두지 않을 때마다 꼭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 만큼, 내 가족만큼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만큼 상처받기 때문이 그러하다. 서로 예의를 지켜야 상처를 만들지 않았고, 그러려면 물리적인 거리가 필수였다. 그러기에, 친정부모님 앞에서 항상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남편이 2주 동안 처가살이를 해야 하는 생각을 하니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도 들었고, 괜히 함께 있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그리했다.


엄마의 말대로 서울 집은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남동생은 정말 새벽에 들어오고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얼굴을 못 보고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엄마는 인천공항에 못 나온 걸 만회라도 하듯이, 안방에 새 침대와 침구류를 사서 꾸며놓았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복합적으로 들면서 서울에서 사흘을 지내고, 나는 남편을 서울 집에 남겨두고 홀로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을 향했다. 오랜만에 온 한국이니, 남편도 내 눈치나 친정부모님 눈치 안 보고 편히 친구들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즐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시골집으로 향하는 내내, 이제 열 살이 된 남동생의 딸, 조카에 대해 상상했다.

한국에 가기 얼마 전, 친정 엄마는 시골집에 조카가 와있다고 했다. 올케가 취직을 했고, 입사 초반에 바쁜 일들이 많아 겨울방학 동안 일주일 혹은 길면 이주일만 조카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마침 그 시기가 내가 방문하는 시기와 겹쳤고, 생애 처음 열 살짜리 여자 아이와 함께 사흘을 보내야 했다.

광주 공항에 도착했고, 입국장에는 일흔을 훌쩍 넘긴 부모님과 똘망똘망 귀여운 여자아이가 함께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엄마 아빠와 허그를 하고, 조카와는 '안녕'하고 인사를 했다. 또래보다 큰 키에, 마른 체형, 하얀 얼굴은 올케를,  나이에 비해 고급 언어를 구사하고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꼭 지 아비를 빼닮았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마침 저녁식사 때라 우리는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아마, 공항에서 식당으로 이동하는 30분이 유일하게 조카와 내가 서먹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카의 에너지는 하늘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했기에 나는 육아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다. 한 가지 확실했던 건, 이 열 살의 꼬마 아가씨는 할머니보다는 엄마또래의 젊은 여자인 고모가 더 좋았던 것이다. 껌딱지가 되어 떨어지지 않고 수다를 떠는 조카는 심지어 '고모, 너무 지금 말이하고 싶은데, 할 말이 다 떨어졌어.'라고 말할 정도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바다가 왜 푸른색인지, 강아지가 정말로 색맹인지, 할아버지는 왜 늦게까지 TV를 보는지, 남자친구는 어떻게 만났는지 등등 전지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때론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아이유 노래를 부르며 집안 콘서트를 강행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학원은 다 다니고 싶고, 본인은 뭐든지 다 배우고 싶다고 하면서 고모가 사는 헝가리는 어떤 곳이지 물어보다, 정확히  9시가 되면 자기 방으로 가 취침을 하고 새벽 6시 반이면 기상을 했다. 어찌나 자기 관리가 철저한지, 새삼 박사 논문을 쓰면서 강의, 각종 연구에 참여하면서 아이를 길러낸 올케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연구하고 일할 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리라.... 또 여기까지 오느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사흘을 조카와 있자니, 어질어질했다.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몸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 가서, 엄마 밥 좀 얻어먹으면서 푹 쉬다와야지 했던 계획은 증발하고 인텐시브 육아 체험에 몸살 앓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사흘을 보내고 구정 하루 전날, 부모님과 조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6시간을 넘게 혼자 운전을 하고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 서울 집에 남동생 부부, 남편 그리고 친정 부모님 이렇게 세 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구정을 지내고 남동생부부는 바로 올케 친정집으로 간다니 하루 이틀 함께 있는 거야 뭐 대수겠어하면서 마음을 다 잡았다.  6시간을 넘는 운전과 육아 체험으로 서울에 오자마자 기절을 했다. 저녁도 못 먹고 잠을 잤다. 이틑날이 구정이니 새벽부터 차례상차린 다고 집안이 시끄러울 테니 조금이라도 더 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새벽에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리길래, 항상 그랬듯이 남동생이 회사에서 긴급 콜을 받고 나갔나 보다 생각했다.


새벽 여섯 시쯤 차례상을 차려야지 하고 일어났다. 집안에 아무도 없다. 조카 혼자 덜렁 자고 있는 것이다.

마침 눈을 뜬 조카카 말한다.


'고모, 새벽에 할머니가 어지러우셔서 병원에 가셨어요. 엄마랑 아빠랑 할아버지랑 응급실에 계세요.'


손녀딸 육아에, 오랜만에 온 딸내미까지 신경 쓰느냐 일흔을 넘긴 엄마가 쓰러진 것이다. 미안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과 왜 나는 깨우지 않았는지 화나는 마음....온갖 마음들이 머리를 들 쑤셨다. 괜히 왔나, 엄마는 괜찮은 건가, 엄마는 부실한 체력에 애초에 왜 애를 봐준다고 했나,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들 것에 실려 응급차를 타고 갔던 엄마가 친정 아빠와 남동생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왔다. 다행히 과로로 인한 어지럼증이어서 푹 쉬면 좋아진다고 한다.  


구정날 아침, 엄마는 방안에 병져 누워있고 나는 남동생을 불러 왜 깨우지 않았는지 묻자 둘 다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아뿔싸, 남편 생각을 못했다. 남편은 친정식구 눈치를 보느냐  불안하고 정신없어 보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 바로 내 유일한 가족, 남편이었다. 남편은 우리가 안방을 쓰는 것부터 미안해했다. 부모님이 서울에 오시고, 안방을 쓰시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으셨다. 덕분에 우리가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편은 작은 방의 침대가 불편했던 건 아닌지, 왜 어머님이 밤에 거실 소파에서 주무시다가 응급실에 가셔야 했는지 미안해했다. 남동생네는 아이를 맡긴 것을 미안해했고, 나는 내가 한국에 온 것이 미안했고, 친정 아빠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미안해 하는 것을  미안해했다.  


 

밥상머리에서 세 가족은 각자 다른 미안한 마음을 품고 소화가 되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오랜만에 온 집. 서울 그러니까 모국에서 그동안 못 먹었던 맛있는 한식도 잔뜩 먹고 필요한 것들도 쇼핑하고 친구들과 부모님과 즐겁게 보내려는 계획은 사라졌다. 남편의 머릿속에는 우리가 빨리 안방을 빼고 장모님을 이 편하게 쉬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맞다. 우리가 집에 있으면 엄마는 쉬지 못한다. 하나라도 뭐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계속 미안한 마음만 들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친정부모님에게 남은 일주일 동안  시고모님 댁에 있겠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명동에 있는 한 호텔로 향했다. 구정을 맞아 여행을 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과 뒤 섞여, 우리는 서울 한 복판에서 완벽한 관광객이 되었다. 마침 체감온도 영하 25도를 기록했고, 호텔 살이를 하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추웠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빨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우리 집에 가고 싶었다. 눈이 오는 명동의 모습을 쓸쓸히 보고 있으면서 되뇌었다. '집에 왔는데, 집에 가고 싶네..... 바보같이 몰랐네. 우리 집은 이제 부다페스트에 있구나.'


  

 


 


     

    

 

 






작가의 이전글 나는 처음 태어났는데 왜 두 번째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