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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수험생 jcobwhy Nov 14. 2022

일상을 멈출 시기를 정하다

와이프 따라 미국 가는 남편 2-2 - 일상은 계속되지만...

아내가 학교를 정한 이후,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해야 했는데, 미국을 가는 준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곳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곳 생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처음 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언제 한국에서의 일상을 멈출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아내는 재택근무로 외국계 IT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집에서 일할 수 있어서 아이를 도우미 없이 등하교시킬 수 있었고, 몇 개 되지 않지만 학원에 등 하원도 시켜주고 있었다. (사실 정말 미친 스케줄이다) 아이는 막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갔다. 작년까지는 팬데믹으로 격일 등교, 격주 등교 등으로 스케줄이 엉망진창이었는데,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전면 등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애니메이션 회사에 출퇴근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재택은 아니었지만 시간차 출퇴근으로 여덟 시 출근, 다섯 시 퇴근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온 가족이 한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미국을 간다는 것은 정말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아내의 학업은 적어도 6년, 교수 말로는 그 이상이라고 하니, 우리가 이민을 간다고 기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민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생활은 거의 완전히 정리해야 한다. 한국에 남겨둔 가족도 없어서, (아흔이 넘으신 아내의 외할머니와 아직 미혼인 처제 한 명 있다) 명절이나 방학이라고 한국에 들어올 일조차 생기지 않는다. 말이 길었지만, 즉, 한국에 남겨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아내의 직장 문제로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이주할 때,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넘어 가봤는데, 정말 그야말로 죽을 뻔했다. 그때 우리 아이가 6개월 때니까, 정말 죽을 둥 살 둥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내 가정 문제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정확하게 3주가 걸렸다. 그때는 아이가 돌이었다. 아이 여권조차 없어서 미국 여권을 정말 긴급으로 신청 발급받았던 기억이 있다.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시절이다.


이번에는 그런 시행착오를 다시 한번 겪고 싶지 않았다. 하나도 지저분하지 않게 말끔하게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에 모든 것을 다 세팅한 후, 기분 좋은 느낌으로 미국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먼저 일상을 멈추고 이주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현재 생활에서 지속하기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새벽같이 회사에 나가 오후 여섯 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일정으로는 미국 가는 준비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의 학교 등하교나 학원 등 하원을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녔다. 이래저래 민폐가 되는 것이 바로 나의 출퇴근이었다. 그렇다고 월급이 아내보다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가장 먼저 멈추어야 하는 일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동력이 가장 높은 사람도 나였다. 사실 아내는 20년짜리 장롱 면허 보유자고, 운전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무슨 업무 처리를 하거나 어디를 가야 할 때, 움직이는 것이 손쉽지 않다. 내가 직장에 매여 있으면 무슨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디를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처리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직장을 먼저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아이의 경우도 고민되는 지점이 있었다. 사실 미국의 학제는 가을학기제라 새로운 학년은 가을에나 시작한다. 아이는 막 3학년을 마쳤고, 미국에 가면 현재 나이를 고려하면 가을에 4학년이 되는데, 굳이 4학년 1학기를 두 번 다녀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너무 좋아했고, 특히 전면 등교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미국에 가는 시점은 8월에나 갈 수 있을 테니, 4학년 1학기를 한국에서 충분히 즐기면서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었다. 결국 아이는 그 누구보다 신나게 학교를 다녔고, 학급 부회장까지 하면서 설치고 다녔다.


아내는 회사 일을 하는 것이 미국 이주에 타격이 가장 적은 터라, 미국에 가기 직전까지 일단 회사 일을 하기로 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아내의 연봉이 더 높고, 학교에 합격했다고 해도 아직 미국 이주 자체에는 여러 가지 허들이 있으며, 아내의 현재 직업이 박사과정 전공과 연구 주제와 연관된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국에 가게 되면 여러 측면에서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우리가 가진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한 푼이 아쉬운 실정이었다. 학교에서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해 주지만, 우리는 온 가족이 미국에 가는 것을 계획했고, 아직 그 연구비(생활비)가 우리에게 충분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른 유학생들의 글들을 찾아보니, 가족 유학생들에게는 부족하다는 증언들이 많아서 마지막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사과정에 합격했다고 미국에 무조건 가는 것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도 아내가 일단 직장을 유지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나름 유명 대학교의 박사 과정에 합격했는데 무슨 말이냐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생각보다 무슨 일로든 미국에 가는 과정은 불확실한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 비자가 거절된다든지 입국이 거절된다든지 하는 일들은 은근히 많은 편이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우리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일들은 정말 많이 벌어졌고, 일종의 보험으로 아내의 직장은 가장 마지막에 그만 두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직업이 아내의 학업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게 되었고, 직장은 글로벌 IT 그룹이니, 그녀의 회사 경험 하나하나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또 이력서에 비는 기간을 최소화하고 싶은 (나의) 욕심도 있었다. 사실 미국에선 그렇게 중요한 포인트는 아닌데, 그냥 기분이 그랬다. 놀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일하고 했다, 뭐 이런 느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결국 나는 5월 말 퇴사, 아이는 4학년 1학기까지 등교, 아내는 할 수 일을 때까지 일하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같이 논의를 하고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특별히 실감 나는 것은 없었다. 그냥 결정해야 하는 거기 때문에 결정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동안에는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Photo by Tom Barre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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