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여행 1장-①] 세병관
삶이 곧 여행이기에, 태어나서 20년 동안 나는 매일 통영 여행을 했다. 대학생이 된 후 서울에서 생활할 때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편지를 쓰다가 어느새 통영행 버스를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 날엔 버스표가 망명 허가증처럼 느껴졌다.
통영에는 이전투구의 오물들을 씻어주는 소금바다가 있다. 겨울에도 향기를 잃지 않는 그 바다에 절여둔 시심(詩心)을 서울에 챙겨와 한참동안 꺼내 먹다가, 다 떨어지면 다시금 통영으로 돌아가 재충전해가며 영혼의 방랑을 바루었다.
이 여행기는 나의 치유를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글에 눈이 닿은 그대에게도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통영에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들려주는 바다가 있다. 사색을 위한 시간이 온후한 바람처럼 흐르니 당신은 그저 묵묵하게 통영에 기대면 된다. 여행자처럼 통영을 산책하는 나와 함께.
통영 가는 길
토요일 아침의 서울남부터미널은 발걸음들이 다르다. 지나는 자리마다 바람이 분다. 아우성치는 깃발을 따라 나는 통영으로 향한다. 서울로부터 탈출하는 버스는 신이 났는지 오구작작 구른다.
차창 밖 와이드 스크린으로 두 편쯤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 후에 통영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2027년에는 서부경남KTX가 완공되고 통영역이 생기게 되었으니 기다림의 시간은 줄어들 예정이다.
북통영 신시가지에 있는 터미널 주변은 2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대나무가 빽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죽림리(竹林里)이다. 죽림 앞바다를 메우고 이제는 아파트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하차장에서 나와 오른편의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대부분의 버스가 통영 시내로 간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버스가 원문고개를 오르는 동안 옆자리의 서울말 승객들이 두리번거리며 바다를 찾았다. 잠시 후, 재를 넘자 눈앞으로 작은 바다인 북신만이 확 다가섰다. 배낭여행객들의 시선이 창밖으로 다이빙했다.
통영사람들은 이 원문고개에 당도할 때 그제야 비로소 통영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북쪽인 원문성이 있던 고개였고 근현대에도 경비초소가 있는 통영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원문고개 왼편으로 기념탑을 하나 스친다. 해병대 전적비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표현이 바로 이곳 원문고개에서 유래한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통영까지 패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1950년 8월, 반격을 위해 해병대가 원문고개에서 통영상륙작전을 벌여 전세를 뒤집었는데 그 모습을 미국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가 “그들은 귀신이라도 잡을 듯 했다”라고 보도하면서 이 말은 한국해병대의 별칭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통영의 많은 청년들은 해병대에 대한 자부심이 컸고 나의 아버지도 그런 이유로 해병대에서 복무했다.
버스가 북신시장을 지나 사거리에서 오른쪽 오르막으로 꺾어든다. 토성고개다. 통영은 조선시대에 군영이었던지라 토성이 있었다. 고갯마루를 홀짝 넘어서면 멀리 미륵산이 용솟음치는 게 보인다.
드디어, 나의 바다에 돌아왔다.
통영여행의 시작, 세병관
명절이나 친척 경조사로 통영에 내려올 때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는 세병관으로 먼저 향했다. 하늘에는 풍등 모양의 구름들을 비추는 선연한 햇발이 새로운 기대를 품게 했다. 통영의 중심부에 위치한 세병관 가는 길에는 여느 소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하지 않은 건물들이 한아히 서있다.
청신한 바람을 맞으며 세병로 언덕을 오르는 우측에 돌장승 하나가 보인다. 통영 등 남도 지방에서는 이런 장승을 벅수라고 부른다. 중요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통영벅수는 1906년에 세워졌다.
붉게 채색되고 일그러진 벅수의 얼굴이 기이하다. 헤벌쭉 웃는 모습이 어떨 때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통영에서는 아둔한 사람에게 ‘벅수’라며 놀리기도 한다. 어쩌면 우매한 세상의 꼴을 보며 벅수가 연신 비웃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녔던 통영초등학교가 세병관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나는 6년간 늘 이 세병관 아래 벅수 앞을 지나야 했다. 그러는 동안 벅수는 학교 수위 할아버지처럼 정겨워졌다. 해괴한 표정이 곰살궂은 미소로 차츰 느껴졌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벅수도 그렇다. 벅수할아버지에게 또 왔다며 눈인사하고 세병관에 올랐다.
세병관? 중국집이야?
사색 없는 독서는 낱말 읽기의 수준에 불과하다. 여행도 똑같다. 공간의 심상들을 읽어나가는 작업인 여행도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깊이에 따라 마음에 채워지는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통영’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대할 때 작품 읽기에 나선 행자들이 통영의 참맛을 느끼기 위한 출발점은 세병관이다. 유명세로 치자면 동피랑 벽화마을이나 미륵산 케이블카, 심지어 통영꿀빵에게도 밀릴 것이다. 하지만 통영이 통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세병관을 만나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으리으리한 무언가가 그 곳에 있기를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다만, 통영다운 평온함이 기다리고 있다.
세병관이라는 나무를 보려면 통영이라는 숲을 봐야 한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지명이 유래한 통영은 조선시대 당시 가장 중요한 군사도시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해군의 중요성을 절감한 조정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나뉘어 있던 해군력을 아우르며 통솔할 목적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지금으로 치면 해군본부인 것이다.
왜란 중에는 통영의 한산도에 두었던 통제영을 전후에 지금의 위치인 통영 내륙부로 옮겨오면서 400여 년 전에 세워진 계획도시 통영의 역사가 시작된다.
세병관은 이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로 쓰인 중심 건물이기 때문에 통영에서 제일 중요한 랜드마크이다. 세병관과 통제영을 중심으로 마을이 구획되었고 통영 민초들의 삶이 살을 붙여갔다.
이때부터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작은 어촌 마을이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을 보위하는 요충지가 되고, 그 바탕 위에 장인들이 넘쳐나는 첨단 도시로 발전해 가다가 근현대에 와서 수산업에 기초한 부유한 항구도시이자 예술가들이 별처럼 자라는 도시로 변모했다.
변방의 불모지는 어떻게 주요 도시가 되었나
드라마의 첫 시작은 세병관이다. 1605년에 완공된 세병관을 중심으로 통제영의 군사용 건물들과 행정시설들이 100여동 세워졌고 12공방 건물이 만들어졌다. 그 후, 군사 요새인 통제영을 지키기 위해 1678년에 통영성의 성곽을 쌓았고, 지금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는 곳 정상에 동포루를, 서피랑 정상에 서포루를, 그리고 세병관 뒷산인 여황산 꼭대기에 북포루를 올려 통영성 방비와 군사 지휘 초소로 사용했다. 영내에는 수군 3만6천여 명과 전선 548척이 주둔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 말기까지 300년 가까이 이어진 통제영의 위용이 갖추어졌다.
세병관 앞뜰에 세워진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1625년)에는 통영을 나라의 특별한 군영으로 만들게 된 지리적 사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서쪽으로는 굴포(堀浦. 판데)를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見內梁)에 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아 실로 바다와 육지의 형세가 나라를 방비하는 요충지이다. 이로 인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도적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천혜의 요새라 ... (하략)”
통영이 국가의 주요 도시로 역사에 갑자기 등장했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조선의 주요 9대로(大路)가 정리되어 있는데, 그중 5로와 6로 두 곳이 통영으로 향하는 도로이다.
조선시대 고속도로가 통영으로 2개나 개통되어 있었던 것을 봐도 그 중요성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길이 숨길처럼 통영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통영이 최첨단도시로 부상하도록 전개되었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무기·장비들과 왕실 진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특출한 솜씨의 장인들이 모아졌다. 이들은 신발, 화살, 말안장, 가구 등을 만드는 수공업 시설인 12공방에 배치되었다.
이 관영 수공업 시스템은 영조·정조 때부터는 민간용 제품으로도 생산을 넓혔다. 이렇게 조선판 대규모 공업단지에서 제작된 ‘Made in 통영’ 상품들은 조선 팔도에서 최고급 물건으로 인정되었는데 특히, 통영갓, 통영소반, 통영나전칠기, 부채 등이 그랬다.
이를테면, 조선의 부채는 전주부채와 통영부채가 양대 산맥이었다. 그런데 전주 부채와 통영 부채는 확실히 특징이 달랐다. 전주부채는 주로 접고 펴는 ‘접선’으로, 가까운 담양 등에서 좋은 대나무를 가져와 부채의 윗부분을 수려하게 만들었다. 반면, 통영미선이라고 불렸던 통영부채는 능숙한 소목장이 많아 부채의 손잡이 부분에 정성을 쏟아 아름답게 꾸몄다.
통영 소반의 경우는 해주반, 나주반과 더불어 ‘조선 3대 명품 소반’으로 이름났었다.
구한말에 통제영이 폐영된 이후에는 민간에서 장인의 명맥을 이었기에 통영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이 존재하게 된다.
또, 통영은 조선시대 문화의 집합지가 되기도 했다. 통제영의 수장인 통제사는 2년에 한번 씩 바뀌었는데, 혼자 부임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사를 보좌하는 고위 간부들 20~70여명이 함께 왔다. 거기에 더해 그 가족들까지 동반 이주하여 통영의 상류층을 형성했는데, 이들의 출신지는 다양했기에 주기적으로 전국 각지의 문화와 풍속들이 통영에 이입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했다.
시어로 지은 이름, 세병
통영초등학교에 다니던 길과 같은 길을 따라 세병관으로 향했다. 통제영지 복원을 위해 지금은 모교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그 많던 문구점들은 다 사라지고 대신 옛 관아들이 가득하다.
세병관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건립한 곳이긴 하지만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존재했다. ‘세병(洗兵)’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 중에 ‘만하세병(挽河洗兵)’이란 구절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길어와 무기(병기)를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세병관에는 피로 물든 세상을 끝내고자 하는 평화의 이상이 담겨있다.
세병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인 지과문(止戈門)을 통과해야 하는데, 지과문에도 평화 정신이 새겨져있다. 병기, 무사를 뜻하는 武(무)자를 해체하여 그칠 지(止)에 창 과(戈)자로 이루어진 지과문은 ‘무기를 거두는 문’이라는 뜻이다. 나는 지과문을 통과하며, 누군가를 상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나에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거두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지과문과 관련해서는 신이한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일제시대에는 지과문 건너편에 경찰서장 관사가 있었다. 일제의 경찰서장이 우리의 민족정신을 지우기 위해 지과문을 없애려 했다가 진노한 혼백에 의해 크게 병이 들게 되어 지과문 철거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통영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만 해도 지과문 돌층계 양 옆으로는 지금보다 가파른 풀언덕이 있었다. 교문과 곧바로 연결된 비탈이라서 하교하는 아이들이 스릴을 즐기며 굴러다니던 썰매장이였다.
그런데 2012년에 통제영 복원공사를 위해 이 풀언덕의 흙을 걷었더니 세병관 담장을 받치기 위해 조선시대 때 쌓았던 석축이 발견되었다. 그때까지 세병관에는 일제가 마름모꼴로 쌓아 올린 견치석(송곳니 모양의 돌) 방식의 석축만이 보였었다. 그러나 이 발굴로 세병관이 원래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을 쌓아올린 조선 전통방식인 장대석 방식으로 석축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조선시대 방식의 석축으로 복원해둔 상태이다.
(위로여행 1장-②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평화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