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여행 1장-②] 통제영지
세병관을 가장 잘 느끼는 방법
오랜 친구 집을 방문하듯 세병관 경내에 들어섰다. 400년간의 지문들이 찍혀 있는 고색의 미끈하고 도톰한 기둥에 손을 댄다. 잠시 시간 여행을 다녀오려 했지만 웃음이 나와 실패했다. 통영에서는 장단지가 굵은 사람을 보면 ‘다리가 세병관 기둥만하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지곤 하는데, 어린 조카의 장단지를 어루만지며 ‘완전 세병관 기둥’이라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은 앞에서 서술한 역사적 연원을 알지 못하더라도 기품 있는 건축미를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목조건물 중에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평면 면적이 넓은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사람의 성격으로 묘사하자면 ‘엄근진’이다.
바닥에는 우물마루가 평활하게 깔려 있다. 마루 위로 훤칠하게 드높은 기둥들은 호위병 같다. 이 기둥들은 느티나무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최근 문화재연구소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기와로 된 팔작지붕은 통제영 뒷산인 여황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대한 투구 모양이다. 여기서 여황(艅艎)은 호화롭게 장식한 배나 군세를 갖춘 큰 전선이라는 의미이다. 이름 그대로 삼도수군의 본영을 옹위하는 산이라 할 수 있겠다.
국보급 문화재 중에서 사람이 직접 올라가 볼 수 있는 건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세병관 마루에는 올라갈 수 있다. 나는 통영에 방문할 때 마다 꼭 세병관에 들러서 너른 마루의 적요 속에 한참을 앉아본다. 그러면 400년 동안 걸려있는 통영 풍경이 세병관 기둥 사이로 액자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사방이 벽 없이 뚫려있는 구조이기에 전후좌우로 감상 가능하다.
우리의 전통 건물들은 차경(借景)을 중시했다. 자연의 경치를 빌려와서 건물의 경관 구성 요소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통영은 끌어다 쓰고픈 자연미가 온통 넘쳤으니 열린 구조로 건물을 올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세병관에서 한동안 넋을 놓고 묵상하다 보면 세상의 근심들이 탄연한 풍광 속으로 흩어져버리는 기분이 든다.
통영의 주산인 여황산은 세병관을 넉넉히 안고 있다. 이 풍수지리 명당인 세병관의 마루에 누워보는 것을 나는 답사객들에게 권한다. 멀리 통영항에서 불어오는 남풍이 번민으로 무장한 나그네들을 해제시킨다. 우주에서 가장 고즈넉한 나무침대에서 꿈을 꾸자.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평화다.
수백 년 전부터 이 곳에 올랐던 선조들의 흔적을 반들반들한 나뭇결 사이로 느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들과 통성명할 기회도 있다. 세병관 천장 아래로 곳곳에 현판들이 눈에 띄는데, 통제영에 부임했던 역대 통제사와 그 부하 장수들의 이름이 출신 지역, 직위와 함께 상세히 나와 있는 것이다.
나는 바닥에 간간히 보이는 새끼손가락만한 틈새 아래의 광경이 사뭇 궁금했다. 세병관 마루 밑은 타임캡슐과 같다. 바닥 틈으로 누군가가 흘렸을 400년 동안의 잡동사니들이 보존되어 있을게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잔구멍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찍어봤다. 그랬더니 특이한 초록색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확대해보니, 롯데껌 ‘왓다’라고 적혀있다.
선들선들 경내를 둘러보고 있는데 어떤 여행자 일행이 ‘洗兵館(세병관)’이라고 적힌 중앙 현판의 크기가 건물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크지 않은가 하고 의아해 한다. 36대 통제사인 서유대의 육중한 필체로 쓰여 있는 세병관 현판은 가로 652㎝, 세로 243㎝ 규모로, 임금이 사는 경복궁의 광화문 현판(428㎝, 173㎝)보다 크다.
사실, 세병관의 현판은 단지 한 건물의 현판이 아니라 통제영의 명패로서 존재했다. 거대한 글씨는 통영항구 어디에서나 보인다. 통제영 영지에 들어서는 배는 멀리서도 세병관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래서 웅장한 규모로 글자를 올린 것은 통제영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 치욕의 시간을 보내다
조선의 주적이었던 왜(일본)에 맞선 통제영의 중심 세병관을 일제는 어떤 이유로 없애지 않은 걸까. 일제강점기 민족말살 정책에 의해 대부분의 통제영 건물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세병관만이 유일하게 남겨졌다.
그 이유는 식민지에서 일제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만들 목적으로 학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병관을 소학교(초등학교)로 활용했다. 지금도 세병관 기둥 윗면을 잘 살펴보면 홈이 파였던 자국들이 보인다. 세병관의 넓은 마루를 나누어 교실을 짓기 위해 칸막이를 설치했던 흔적이다.
<토지>를 쓴 소설가 박경리는 일제시대 당시 세병관에 위치했던 통영공립보통학교(현재의 통영초등학교)를 다녔었다.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한국말을 한 번도 안 쓴 아이들에게 교사들이 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상을 받는 아이들을 박경리는 싫어했다. 박경리 선생의 산문집 <가설을 위한 망상>에는 학교로 이용된 세병관에서의 기억이 적혀 있다.
제가 통영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릴 때 민족주의라든가 국가개념·자주적이라든가 하는 의식을 과감하게 심어준 곳이 통영이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 친구들하고 숙원하던 것이 세병관(당시에는 교실로 사용)의 칠판에 빨간 분필로 ‘대한독립만세와 일본에 대한 욕’을 써 놓는 것이었는데, 그때로서는 거의 폭발적으로 정신을 흔드는 행위였지요...... 독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입 밖에 낼 때는 생명을 내 놓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일이었고 오늘날 전쟁을 하는 상황하고 그 강도가 비슷했어요.
외세의 침입에 맞서던 군사도시였기에 통영에서 민족주체성을 지우려던 일본의 시도는 매우 활발했다. 특히, 자주 국방의 상징인 세병관은 일제 식민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제시대를 지나오며 잃어버렸던 통제영의 유적들이 최근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발견들도 있었다. 2012년 11월, 통제영 복원을 위한 석축 해체과정에서 1701년(숙종 27년)에 액막이로 쓰였던 돌벅수(사람 모양의 돌조각) 4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세병관 마당 동편에 나란히 세워둔 제주 돌하르방같이 생긴 석인들이 그것이다. 각기 다른 얼굴 모양을 한 이 돌벅수들의 표정이 꽤 별쭝나다.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후생에 석인이 되어 군기(軍旗)를 평생 들어야 하는 벌이라도 받은 걸까.
바다가 보이는 교실
세병관에서 동쪽으로 연결된 문을 나오면 바로 오른편에 비석들이 도열해있다. 역대 통제사들의 공적을 각비해 둔 것이다. 내가 통영초등학교에 다닐 때 후문 바로 옆에 있던 이 통제사비군을 우리 반이 맡아 청소하기도 했는데 우리들에게는 비석 사이로 술래잡기를 하는 것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여기서 장난치면 안 된다는 꾸지람을 들으면서, 벌로 통제사에 대해 조사해서 공책에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무슨 내용으로 채웠었는지 지금이야 기억나지 않지만 인터넷이 없던 때라 학교 복도 곳곳에 붙어있던 제1대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내용을 참고했을 것이다. 통영의 철부지들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통제사가 어마어마한 인물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오후의 누그러진 볕을 받으며 세병관 주위의 통제영 부속 건물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시간의 질감이 두터운 세병관과 달리 부속 건물들은 신신한 풍취가 든다. 그 이유는 일제가 도려낸 통제영 터에 해방 후 들어와 있던 학교와 법원, 검찰청 등을 2000년대 중반에 다른 곳으로 이전시킨 다음에 조선 수군의 관사들을 근래에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통제사 비석군을 비껴 지나오면 통제사의 집무실인 운주당이 있다. 조선 바다를 호령하던 통제사의 정당(政堂) 운주당도 일제시대에 허물어지는 치욕을 당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통제사는 독립적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운주당 동편 언덕에 주전소 터가 남아있는데,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일한 주전 유적이기에 의미가 깊다.
통제영 답사의 절정은 세병관 지붕 너머 내려다보는 통영이다. 그 맛을 음미하러 통제영지 뒤란 정자에 올랐다. 산경(山景) 해경(海景)에 탄복하며 자연의 무늬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기억의 단물을 빨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라 어느덧 나는 초등학생이던 날들로 순간이동했다. 1908년에 개교한 통영초등학교는 세병관 교사(校舍) 시절을 끝낸 후부터 2005년까지 지금의 통제영 12공방지 일대에 위치했었다.
조선 장인들의 기예를 닮은 한국의 예술 장인들이 통영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꽃>을 쓴 김춘수 시인, <봉선화>의 시조시인 김상옥,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 세계적 거장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이 이 곳을 졸업했다.
아직도 아쉬운 기억 중의 하나가 떠오른다. 통영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나를 포함해 몇 명의 아이들을 호출했다. 학교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우리 학교 출신의 선배들 중 몇 분께 기념식에 초대하는 편지를 써 보라고 주문하셨다. 나는 내심 박경리 선배나 김춘수 선배를 내가 담당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면 팬레터를 쓰듯 애정을 다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임의로 배정해준 상대는 대법원장을 지낸 이일규 선배였다. 나는 그래서 문학적 편지 대신 법문 같은 편지를 썼던듯하다.
요람기의 잔영을 밟으며 거닌 통제영지 언덕의 정자 서편에는 백두산교실이라고 부르던, 통영초등학교에 딸린 5칸짜리 교사(校舍)가 한때 있었다. 학교가 이사 간 현재에도 백두산교실로 등반하던 36계단은 여태 남아있다. 계단 꼭대기의 작은 교정에서 바라보던 통영바다는 지워지지 않는 나의 백두산 천지다. 그 회억의 조각을 내 마음의 서랍 깊숙이 넣고 지내왔다.
사라졌던 역사유적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세워놓는 일이야 당연하고 반가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통제영지에 가 볼 때마다 애틋한 기억의 공간이 증발해버려 마음 귀퉁이가 아릿하다.
나의 가족들은 모두 통영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부모님의 재학 시기인 1950, 60년대에는 세병관과 학교 사이에 담이 없어서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세병관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온갖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관리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었겠지만 추억이 보물처럼 쌓였을 것이다.
내가 초등생일 무렵에는 세병관과 학교 사이에 담장이 있었다. 흙투성이 우리들에게 세병관은 학교랑 붙어있는 큰 기와지붕의 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나 축구를 하다가 공이 담장을 넘어가면 세병관에 슬쩍 넘어가서 주워 오는 게 우리들이 문화재를 답사하는 주목적이었다.
아낌없이 주는 느티나무
세병관의 서쪽 언덕에는 통영초등학교의 교문이 있었고 거기에는 지금도 신령스런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통제영 창건 당시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400살 이상 된 노수이다. 다른 여행자들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는지 한참 고목을 살핀다. 둘레 길이가 5미터나 되는 이 느티나무는 우리학교 아이들에게 기꺼이 놀이터가 되어주던 온윤한 할머니 같은 존재였다. 지난 400년간 통영 바다를 굽어보며 현달한 관록이 가지마다 열려 있는 듯하다.
초등학생 때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리면 선생님의 인도 아래 우리들은 그 느티나무 밑으로 대피하는 연습을 했다.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린 우리를 뒤덮고 있는 노목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무성한 잎사귀가 할머니 약손처럼 감싸는 녹음 안으로 폭탄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세병관의 지붕이,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보듬어야 할 야만의 비극이 우리 가까이에 그리고 세계 도처에 여전하다. 전쟁이 비인간적인 이유는 총구에는 눈이 없고 탱크에는 심장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는 나의 삶 속에 타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일 것인데 경쟁과 혐오에 눈먼 세계는 공존을 학살하고 있다.
평화의 기지 세병관 마루에 앉아 있으면 녹슨 탄피를 주워 매달아 만들었다는 옛 학교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슬픔을 베고 누워 새 꿈을 꾼다. 보물 같은 통영 바다의 문하생이 되어 평화를 배울 수 있다면 세상은 무기 대신 악기를 손에 쥘 것이다. 화평의 악곡이 이루는 앙상블을 언젠가는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