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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혁 Jan 11. 2021

여행자처럼 통영 걷기

[위로여행 2장-①] 세병로/소설<김약국의 딸들>/청마 유치환


남망산에서 본 통영 바다


나는 느린 아이였다. 운동회라든지 체력 검사를 위해 달리기를 할 때 한 번도 상위권에 든 적이 없다. 고백컨대, 나는 굳이 빠르게 달려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일등 상품으로 걸린 학용품 따위에 대한 갈망도 없었고 숨을 헐떡여가며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도 없었다.



나의 느림은 육체적 한계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 보다는 정신적 선호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중학교 한문 수업시간에 ‘주마간산(走馬看山)’을 배웠을 때 내 느림의 철학적 근거를 찾은 듯 기뻤다. 



성인이 된 후에 느림은 더욱 강화되었다. 말도 행동도 비만 고양이처럼 느리다. 느림보 기질은 어느새 삶의 지향이 되어버렸는지 첫 연애도 느리게 27살에 했고, 대학 졸업도 느리게 12년 만에 했다. 그러다가 죽음도 늦게 올 거라고 친구들은 위로한다.



나의 느림은 습관화된 멍 때리기 덕분이다. 통영 바다는 나의 취미이자 특기인 멍을 길렀다. 어머니의 포대기에서부터 보아온 통영 바다를 구성하는 물결의 유동과 갈매기의 한유가 나의 멍선생이다. 



나는 앞으로도 천천히 걸으면서 깊게 보고 싶다. 여행은 영혼의 산책이다. 애벌레가 성충으로 자라는 속도로, 비만 아닌 낭만 고양이처럼 영혼을 살찌우는 여행을 하리라.



가운데 보이는 큰 기와지붕 건물이 세병관. 그 왼편 아래가 간창골이다.



세병로



통영 세병관을 빠져나온 일군의 단체관광객들이 유람버스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많은 통영 여행자들이 세병관을 둘러본 후 인접한 거리에 있어서 흔히 찾는 통영중앙시장과 동피랑 벽화마을에 가는 길인 듯 했다.



나는 걷기를 추천한다. 세병관에서 통영중앙시장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0분가량 밖에 걸리지 않는데, 모르고 걸으면 그냥 관광지와 관광지 사이를 잇는 길일뿐이겠지만 알고 걸으면 시간여행이 가능한 예사롭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자연미는 있는 그대로만으로도 감흥이 차오르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미는 거기에 담긴 사연들의 실타래를 만져보아야 감동이 커진다. 통영은 곳곳이 이야기가 담긴 박물관이다. 이름난 곳이 아니라도 조각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들을 해득한다면 여행의 의미는 충분하다.



‘세병로’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길은 조선시대에서 근현대로 걸어가는 거리이다. 행정적으로는 문화동과 중앙동에 걸쳐 있다. 통제영 시절부터 일제시대와 해방을 지나오는 동안 통영의 가장 중심지로서 존재했던 거리를 느긋한 길고양이처럼 움직였다. 



박경리 원작의 영화 <김약국의 딸들>(1963년)의 한 장면. 남망산에서 바라본 통영항
남망산에서 바라본 통영항의 2015년 풍경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간창골



굼뜨게 걸어야 제 맛을 보는 통영의 보폭으로 몽글몽글한 햇살을 받으며 세병관 아래 내리막길로 나왔다. 여기는 조선시대 때 박석이 깔려 있어 박석골이라 불렸다. 비 오는 날 돌바닥 틈새로 흘렀을 물방울의 청아한 음곡을 상상하며 걸으면 돌벅수 앞 네거리에 도착한다. 



원래 벅수가 있던 곳은 지금 위치 보다 20여 미터 아래쪽이다. 이곳 십자로는 조선시대 통영의 교통 요지였다. 성곽도시 통영의 동문, 서문, 남문, 북문으로 통하는 교차지점인 것이다.



그 교차점에서 서쪽에 있는 동네가 바로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무대인 간창골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 관청들이 모여 있던 동네라서 간창골로 불리게 되었다. 박경리 선생은 간창골의 옛 모습들을 기록이라도 하려는 듯 소설 속에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집안의 몰락 과정을 그려낸 이 작품은 1963년에 동명의 영화(감독 유현목)로 개봉되었는데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 비극상을 받기도 했다.



박경리 선생은 간창골에서 충렬사 방향으로 넘어가는 언덕인 서문고개에서 1926년에 태어났다. 감성소녀의 발걸음들이 간창골 골목골목에 닿았을 것이다. 구불구불한 인간사를 촘촘히 그려낸 대작가의 이야기는 기실 새미(우물)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이 때를 씻어내듯 나눈 희로애락에 뿌리를 둔다. 선생의 책 한 권 들고 구불구불한 동리를 오르내리며 문학기행을 하는 고급 여행자들이 이따금 눈에 띈다.


 

통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충무교회. 유치환 시인이 살던 영산장이 함께 있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거리



세병로를 따라 내려갔다. 통제영 거리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공사 구간에 작은 상점들이 많았다. 2014년 통영 방문 때 길 서편에 있던 은성상회라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생수 한 병을 샀다. 이 곳은 내가 통영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생명수 같은 군것질거리들의 공급원이었다. 주인아주머니께 물으니 1970년대부터 그 자리에 쭉 계셨었다고 한다. 



조금 더 걷다보면 우측에 충무교회가 보인다. 1905년에 대화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통영에서 가장 오랜 역사의 교회다. 원래는 두 개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는데, 2020년 9월 태풍 마이삭 때문에 첨탑 하나가 부러져버렸다. 

이 곳은 2017년에 개봉한 영화 <1987>의 중요 장면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이 재야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설경구)을 검거하기 위해 ‘김정남’이 은신해있는 교회를 찾아내고 치열한 추격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교회 지붕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설경구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영롱한 예수 모습과 겹쳐진다. 



이상적 사회를 향해 파득거리는 아우성이 재현되었던 충무교회에는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시 <깃발>을 쓴 시인 유치환이 살던 영산장이 그 안에 있었다. 유치환의 아내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에 딸린 곳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깃발>



통영 출신의 시인 청마 유치환은 인간 생명에 대한 사유에 집중한 생명파 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통영시에서는 청마의 사색과 창작의 근거지였던 이 세병로 구간을 청마거리로 지정하고 흉상과 시비를 설치했다. 



청마가 추적한 인간 생명의 원상(原象)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 때는 종군시인으로 참여하여 전쟁을 기록하는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 젊은 인민군의 시체를 보고 ‘한 떨기 들꽃’이라고 비유하며 슬퍼한 청마의 그 시절 시에는 이데올로기 보다 강력한 휴머니즘이 자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대에는 정권을 비판하는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등 독재에 저항하는 글들을 쓰기도 했다. 당시에는 꺼내기 힘들었던 ‘일당독재’, ‘폭군’, ‘강도의 두목’ 등의 신랄한 표현으로 칼럼들을 썼다. 그러다가도, 4.19 의거로 자유당이 파락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기쁘지 않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지성인은 영원한 야당’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청마가 몰두한 인간의 본연이란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가치가 오롯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병로 남쪽 끝에 있는 청마 유치환상



유치환도 싫어할 문학수업

 


그러나 유치환의 골수를 담은 작품도 교과서에 실리면 그냥 입시를 위해 외워야하는 문제로 전락한다. 나는 대학생 때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울 대치동 등의 입시학원에서 7년간 국어와 논술강사로 일했는데, 그 시절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이 이런 점이었다. 대문호들은 문학 작품 속에 삶의 가치를 새겨두었는데 나는 학생들에게 당장의 시험 점수를 위해 문학이 선사하는 의미들을 자근자근 분해하여 점수 따기에 좋게끔 건조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 슬펐다.



나에게는 문학의 의미를 선명하게 호흡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통영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교지편집부(문예부)에서 활동했는데, 교지에 실을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 부원들과 함께 통영에 있는 수국작가촌에서 열린 문학행사에 참석했다. 전국에서 모인 문인들과 문학 애호가들이 문학에 대해 대담하는 자리였다. 거기서 김남조 시인 등 한국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문장가들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부원들의 애초 계획은 그날 수줍게 행사장 끄트머리에 앉아 취재하다가 조용히 빠져나오는 거였다. 그런데 메인행사 도중에 사회자분이 “이 통영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방문해주셨다”고 소개하며 관객석 맨 앞자리에 우리를 앉게 했다. 좌중의 주목과 박수를 받으며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단 착석했다. 

사회자는 우리들이 연단의 문인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시간을 주셨다. 문학도시 통영 청소년들의 격조 있는 질문을 기대하는 눈동자들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것 같았다. 행사에 대해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글을 쓸 생각이어서 따로 질문을 준비하지 않은 까닭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부원들은 폭탄돌리기 하듯 교지편집부장이었던 나에게 마이크를 밀어주었다. 나는 더듬더듬 어설픈 질문을 급조해냈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요?” 



객석이 잠시 왁자해졌다. 너무 추상적인 질문이라서 말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연단에 있던 한 시인이 친절하게 답했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기억한다.



‘저는 이 곳 통영에서 자라는 학생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좋은 시란 아름다운 말을 쓰는 게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빌려오는 것이기에 통영의 학생들은 시인이 될 가능성이 많지요. 통영에 담긴 시 한 수, 소설 한편들, 사람들의 사연들을 마음의 방에서 숙성해 펜을 들면 좋은 글이 될 겁니다. 잘 숙성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먹기에도 알맞겠지요. 자근자근 씹으면 무럭무럭 삶의 근육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일 겁니다.’



그랬다. 박경리 작가도 ‘통영 사람들은 예술가의 DNA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심(詩心)은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일렁이고 우리는 그냥 온몸을 벗고 물놀이를 즐기면 된다. 그러면 까맣게 그을려오는 피부처럼 시상이 타오는 곳이 통영이다. 



우리의 문학교육이 삶의 바다에서 즐기는 물놀이와 같을 수 있다면 어떨까. 박제가 된 시험빈출 문학 문제집 속의 ‘깃발’이 아니라 학생들이 저마다의 해원을 향해 흔드는 ‘깃발’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스러울까. 백사장에 상념을 끼적대어도 빵점이 없는 학교를 위해 깃발을 휘날려본다.



(위로여행 2장-② <통영 시간 여행>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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