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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조그만 아이의 말을 따라 하고 싶은 날

by 윤혜경

새벽 3시.

서재방의 침대에서 자다가 깨어 나온 70대 초반 남편이

맞은편 아내 서재에서 방문을 열어둔 채 아직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하는 말


"아직도 일하는 거야?

잠 안 자?

아직도 안 끝났어?"


3년여 강의자료를 토대로 쓰는 원고이니 자료 준비는 다 되어 있다. 그렇다 해도 통계자료는 2025년 최신 자료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국제기관이나 해외 기관들 중 더 포괄적인 의미로 개명한 기관의 목적과 활동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

그렇잖아도 고단하기 그지없는 아내에게 남의 편 질문이 참...


"......................"


" 당신 원고를 언제부터 썼지?"


60대 후반 아내가 크게 호흡을 하고 응답했다.

"8주쯤 되었는데... "


우렁 각시처럼 가사를 분담 중인 남편이 다시 말했다.

"나는 한 6개월 된 줄 알았네.

매일 과로를 하면 어쩌려고 그래? "




네 살 갓 지났을 때 손주가 그날의 보호자가

"장난감을 정리하자"

"모두 흩트리지 말고 치우면서 놀자" 등

맘에 안 드는 말을 하면

불편한 맘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그런 말 하지 마! "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예상치 못한 아이 반응에 깜짝 놀랐었다.


그 조그만 입술 끝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거부하는 표현이 나왔다. 나와 아이 이모는 맥락에 맞게 표현하는 아이에게 감탄했다.


아이에게 존댓말을 열심히 사용하며, 어른에 대한 존댓말 사용을 교육 중인 작은 딸 부부는 대부분 아이가 잠든 후 퇴근하니, 제 아이의 표현들을 아마도 못 들어봤을 수도 있다.


말을 배워가는 아이의 표현 중 무례한 표현들이나 맥락이 맞지 않은 표현들은 무심코 내뱉은 보호자나 양가 조부모, 돌봄 이모 등 돌보미 팀에게서 배웠을 수 있다. 유치원 또는 놀이터에서 노는 동안 배워올 수도 있다.


요즘 흔한 '1 자녀'인 손주는 집에서 함께 놀 형제자매가 없다. 집에서 아이는 성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대신 유아원과 유치원을 다니면서 또래와의 사회성이 향상되고, 집에선 사용하지 않은 표현들을 다양하게 배워온다.


가끔 딸의 긴급 요청에 응해서 내 일정을 조절하여 임시 보호자로서 5살 남아와 하원 후 놀이터에 동행한다.

주로 밤 사이 아이가 아프거나, 유치원 휴원일, 또는 전문 돌봄 이모가 사정이 생겨 못 오는 때이다.


네 살 그룹 유아원을 1년 다니고, 이제 5세 반 유치원 생으로 격상되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또래나 한두 살 위의 형아들이 친구들과 사용하는 표현을 처음 듣는다. 그럴 때 아이는 반복해서 그 표현을 익히곤 한다.


외국어 학습에 딱 필요한 방법인데, 아주 어릴 때부터 처음 듣는 표현을 따라서 반복하곤 했었다. 덕분인지 언어 표현이 발달해 있다.


4세 때 한 살 위 유치원생을

"친구니?"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형님반이에요."

했었다.


유아원 시기부터 한국의 서열문화가 대단하다. 드디어 5세 형님반 구성원이 된 손주는 이제 자신을 간섭하는 사람에게 거부하는 강한 표현을 맥락을 확실히 알고 다양하게 사용하는 듯하다.




"그런 말 하지 마! "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아이에게서 들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내는 말한다.


"맞아, 나도 엄청 오래된 것 같아. 자주 확인하게 되네.

끝이 저만치 보이는데, 다 와서 수렁에 빠진 듯 심란해지곤 해."


"고생이 많네."

"엉킨 부분을 교정하노라면 이 비경제적인 작업을 당장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 "


마음속에선


"그런 말 하지 마! "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가 몇 번이나 삐죽이며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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