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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은 조심하랬지!

마지막 수업

by 윤혜경

마지막 수업


생각이 많았다. 그동안 짧게 소개한 소근육 운동은 참가자분들이 복습해서 명절에 가족끼리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연습 기회를 제공하고, 11주에 걸친 22회차의 나눔 시간에 대한 PPT 동영상도 준비하고... 동영상을 보며 도서관에서 준비한 다과를 즐기며 자유롭게 소통할 예정이었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는 그동안 찍은 사진 중 뽑아서 책갈피로 만들어주십사고 부탁드렸었다. 동의사인을 받아서 보고서에 사용하는, 얼굴을 흐리게 처리한 사진 외는 혹여 초상권에 저촉되지 않게 모든 사진을 폐기한다.


나는 봄의 라일락 꽃잎과 이파리, 벚꽃 잎, 가을의 단풍과 은행잎을 말려서 매년 책갈피로 만들어 선물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이번엔 도서관 사서선생님이 도움을 제안해서 참가자분들의 사진과 강아지 스티커를 보내드렸다.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사서선생님은 헌신적인 도움을 제공해왔다.

참여자들을 위한 자료로 책과 독서노트도 사서선생님이 디자인해서 책자로 만들어 제공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시와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리딩독 교실 참여로 인한 그동안의 변화를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알폰스 도테의 소설 <마지막 수업> 주인공인 개구쟁이 '프란츠'만큼은 아니라도 일부 참여자들의 지각으로 인해 수업 시작은 소수로, 끝은 다수로 마무리된다.


사실 강사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매력 있게 강의를 이끌어서 그분들이 1분의 강의도 놓치는 걸 아까워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이럴 땐 웃음치료 강사처럼 웃음을 선물하는 재주가 있으면 좋겠다.


동물응용과학 연구자로서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1만 2천 년이 넘는 반려동물과의 역사를 재미있게 소개하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든 동물들과의 동행을 찾아보고자 했다.


반려동물 동행의 역사와 동물권에 더해서, 인간의 육식 습관과 우월한 위치에서의 횡포로 인한 무참한 농장동물과 실험동물 학대를 충격적이지 않게 슬핏 들여다보고, 2023년 전면개정된 동물보호법과 세계 공통의 동물복지 근본인 <동물의 5대 자유(권리)>를 소개하고 싶었다.


동물의 5대 자유

배고픔과 갈증, 영양불량으로부터의 자유

불안과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정상적인 행동을 표현할 자유

통증•부상•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

(출처: 국가동물보호정보시스템, “동물복지 개요 「동물의 5대 자유란?」”, https://www.animal.go.kr/

, 방문일자: 2025.10.02.)

한 동물로 생산되는 축산물

즉 인문학을 들여다보며, 생명에 대한 생각을 모아서 '인간과 동물과 자연의 건강은 하나' 임을 소개하는 일이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교감과 생명존중을 연구하는 국제기구 IAHAIO는 2018년 개정 백서(IAHAIO White Paper 2018)에서 "One Health, One Wealth"로 '인간과 동물과 자연의 건강과 복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정의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육식을 조금씩 줄이고, "우리 이제부터라도 동물이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들의 인성을 따뜻하게 발휘합시다"에 강의 의도가 있었다.



고마움 가득


참가자들의 따스한 눈빛과 적극적인 질문은 강사를 힘이 나게 한다. 도서관 강의가 있는 날에는 교재 원고 출판 작업이 흐트러지지 않게 집중하는 중에, 미리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를 위한 PPT 준비를 하느라 새벽에 두어 시간 눈 붙이고 출발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참가자들의 애정 어린 질문과 반짝거리는 눈빛은 두어 시간 수면으로 체력이 달리는 강사의 정신을 총총 깨어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운전을 도맡은 옆지기 덕분에 돌아오는 길에는 편안히 꿀맛의 잠을 잘 수 있었다.


시드니 대학원 시절엔 시속 80으로 외곽 고속화도로를 1시간 가까이 달려서 학교에 가고, 돌아와서 아이들 악기 레슨을 데려다주고, 끝나면 집에 데려다 놓고 다시 먼 거리의 학교 도서관 그룹스터디를 가곤 했었다.


그룹스터디 멤버가 좋았고, 왕언니인 나를 따돌림시키지 않고 살뜰히 품어주니 행복했다. 당시엔 나도 40대 초반의 파릇한 나이(?)였다.


이젠 운전에 힘쓰면 강의하면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체력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든든한 은퇴자인 옆지기의 도움을 받으니 고맙고 참 좋다. 택시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데, 옆지기는 이때만큼은 확실하게 내 반쪽 느낌이다. 이토록 사심 없이 편안하고 고마운 서비스 제공자가 배우자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동료연구자인 큰딸은 동물교감치유견을 알뜰살뜰 챙긴다. 도우미견이 참여하는 부분은 전문 핸들러로서 큰 딸이 진행하니 나는 전체적인 강의 흐름을 준비하면 되었다. 우린 1+1 강사이다. 참가자와 참여도우미견의 절대 안전과 동물복지를 위해 전문가와 핸들러가 함께 한다.


10시부터 시작하는 강의지만 출근길의 병목현상을 감안해서 아침 7시에 출발한다. 8시 조금 넘어 도착하면 도서관 주차장도 널널해서 좋았다.


처음엔 도서관 바로 옆에 참기름 향이 근사한 꼬마 김밥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고, 화장싦 세면대에서 양치 후 매무새를 만지고 도서관으로 갔다.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에 매번 새벽 KTX로 이동하는 날 아침, 점심, 저녁 식이요법이 필요한 큰 딸의 도시락을 3개씩 준비하면서 옆지기의 음식준비 실력이 쑤욱 늘었다.


옆지기는 강의 2주째부터 다양한 주먹밥에 후식 과일까지 손 빠르게 준비했다. 마치 소풍 가듯 도서관 옆 뜰 주차장 차 속에서 햇살을 받으며 도시락 파티가 아침마다 열렸다.


강의 시작 시간보다 100분 전에 도착하여 큰딸은 먼저 동물교감치유견인 수리를 데리고 산책을 하며 바람을 쐬어준다. 수리는 쉬를 충분히 여러 번 하면서 영역표시로 긴장을 푼다.


이후 아침 식사를 하고, 휴식을 잠시 취한 후, 4~50분 전쯤 우린 강의실에 제일 먼저 도착한다. 물론 담당 도서관 선생님은 이토록 빨리 나타나는 강사를 위해 교실을 열어두고 온도 조절까지 이미 해둔다.


돋보기가 필요한 나는 핸들러이자 눈이 맑은 동료연구자인 큰 딸의 도움을 받아 PPT 확인을 한다. 이어서 큰딸은 도우미견이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강의실을 개와 함께 구석구석 돌며 킁킁 놀이를 유도한다.


개는 코로 냄새를 맡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도우미견의 정서를 먼저 안정시킨 후, 15분 전쯤부터 들어오기 시작하는 참가자들을 맞이하곤 했었다



'지각을 하지 마시라' 뒤에 생긴 일


지난 시간에 그동안 일부 참가자의 "지각"에 대한 강사의 생각을 조심해서 전달했다. '조금만 일찍 나와주십사'라고 부탁을 했다.


아, 그런데 평소와 달리 오늘 도로상황이 이상하다.


집에서 출발 후 경기도와의 경계에 도착했을 무렵 그곳 지하철 역 부근 큰 도로에서 마치 명절 때의 고속도로 위처럼 운전자들이 차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였다. 버스, 택시, 유치원차, 승용차, 물품 배송 차 모두 한 걸음을 못 가고 그냥 서 있다.


무슨 일인가 목을 길게 빼서 창밖을 내다보아도 커다란 버스 궁둥이만 보일뿐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 일찍 출발했으니 설령 여기서 30분쯤 지체해도 별일 없겠지' 했다.


멈춤이 길어지니 옆지기는 '다리가 저려온다'라고 했다.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깔리기 시작하는데, 앞 좌석의 동료인 큰딸도 불안한가 보다.


"이러다 10시 넘어 도착하면 어떡하지?"

"설마... 그런 말 하지 마! 싫다!"


나는 불안을 섣부르게 말로 표현한 젊은 동료의 입을 막았다. 1시간 거리를 2시간 30분 전에 출발했으니 10시 넘어 도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와 달리 조금 늦은 9시 40분 즈음 도착하게 될 터이다. 강의는 10시부터이니 우리들의 아침은 건너뛰게 되는 정도로 추정했다.


*사진: 아침이면 꽃잎을 펼치는 사랑초

(꽃말: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그래도 딸의 그 표현이 'omen 오멘'(징조)이 될까 봐 두려웠다.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에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라고 하지 않던가?


오늘은 다행히 수리가 동행하지 않는, 그동안의 수업 마무리를 하는 마지막 수업이다. 말티스 '수리'가 있었다면 이토록 긴 지체에 '수리'가 힘들었을게다.


"아, 나 지하철로 가야 할까? 혼자 운전해서 올래요?"

"그게 나을까?"


옆지기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나 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자 그대로 상상일 뿐, 서울역에서 한참 멀어진 이곳에서 다시 서울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고 킨텍스에 내려서 일산 도서관까지 지하철로 가면 택시나 버스로 갈아타는 시간까지 2시간 걸리니 이미 가능한 일이 아닌 패였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드디어 옆지기가

"지하철이 낫겠는데?"

"택시는?"

"택시도 나처럼 갇혀있잖아."

"지하철을 타면 내려서 다시 택시를 타야 하는데... 이동 시간이 있으니 이미 40분은 늦을 텐데..."


결국 늦어도 승용차로 달리는 걸로 결정을 하고 이미 늦은 상황에 대해선 대책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 남자의 장점이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선 뒤 돌아보지 말고, 대책을 찾자'는 스타일.


그리고 길이 뚫리기 시작한 건 90분이 훨씬 지나서였다. 몇 번의 통화로 도서관 담당자 선생님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렸다.


사서 선생님은 '참가자들에게 30분 정도 늦게 시작하게 됨을 공지하겠다'라고 했다. 혹시 내가 늦으면 선생님이 설문지 통계 등을 먼저 시행하시는 걸로 의논을 했다.


대형 교통사고와 경기도를 잇는 지하철 공사로 5차선을 모두 막고 1개 차선만 가도록 경찰이 서서 차들의 이동을 안내하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찾아보던 교통방송에서도 안 나온 사고현장은 땅이 움푹 꺼져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경찰차와 단속 경찰 인력이 사고현장 즈음에서야 보였다.


이럴 때 길게 늘어선 차량 운전자들에게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우린 영문도 모르고 10미터 이동에 1시간이 넘게 걸리며 마음을 졸였는데... 알았더라면 중간에 지하철로 바꿔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교통위반 스티커를 받더라도 조금 달리자'라고 옆지기를 재촉했다.


아, 바로 전 시간에 지각하는 수강자들에게 지각에 대한 내 소감을 전달하고 생긴 일이다. 그래도 교통규칙을 준수하며 '달려 달려'가서 강의실에 도착했다. 이미 원래 시간보다 1시간 가까이 늦었다. 딸의 예상을 넘어서는 지각이었다.



뒤늦은 후회


아이고, 지난 시간에 지각에 대한 언급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서선생님으로부터 '30분 늦게 오시라'는 연락을 받은 수강생분들은 30분 늦게 강의실에 도착했을게다. 민망함이 얼굴 가득 담긴 채 나는 허리를 숙여 수업시작 인사를 하며, 수강자분들께 죄송함을 전했다.


"선생님, 설마 방송에 나온 그 사고 난 길로 오신 건 아니죠?"

"그 길로 왔어요."

"아이고~"

"그러게요. 이미 들어선 길을 돌아 나설 수도 없이 꽉 갇혀서 지난 시간의 제 장담을 후회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모두 각각의 사정이 있을진대

'그런 장담은 섣부르게 하는 게 아니다'

는 말씀을 주신 것 같습니다."


수강생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 내리막길 나이에도 겸손하지 못함으로 인한 실수를 하며 깨우치는 중이다.

앞으로 나는 '지각'에 대해선 입도 뻥긋할 수가 없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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