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는 어른의 휴식법이 필요하다
생의 의욕을 잃었어
전화기를 빰 위에 올려놓은 채 대뜸 고백했다. 스마트폰은 제 주인과 닮지 않게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잃은 게 죄다 이 기기로 옮겨진 것일까. 하긴, 내 삶은 대부분 이를 통해 매개되고 있으니, 내 삶의 의욕을 하나둘 쯤 가로챘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헉, 그건 정말 큰일인데
연인은 호들갑을 떨며 흡족한 반응을 보여줬다.
혹자에게는 '의욕 없음' 상태가 뭐 그리 특별한 것이냐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삼 년 간의 내 삶을 아는 주변인이라면, 꼭 연인이 아니었어도 비슷한 반응을 내게 보였을 것이다.
내 삶은 빈틈없이 차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에는 필요도 없는 외국어 단어를 출근길에 외우고 취미로 자격증을 따고 다녔다. 주말에는 업무 관련 스터디를 하거나 요청 들어온 강의/멘토링 자리에 뛰어다니기 바빴다. 나는 달리면서 동시에 목표 지점들을 찍어댔고, 성취의 짜릿함을 느끼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래, 그랬는데 도무지 의욕이 안 생기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려 하는데 그걸 생각해볼 의욕조차 들지 않는다. 식욕도 색욕도 별로 생기질 않는다. 그냥 폭닥한 이불에 몸을 파묻고, 천장에 드리운 햇빛이 사위어가는 걸 보고 싶다.
번아웃이 온 걸까?
웅얼거리듯 질문 던지는 내게, 연인은 단호하게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건 아닌 것 같아'도 아니고 그냥 '그건 아냐'라니.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덧붙인다.
하루이틀만 푹 쉬어도 금방 회복될 거야.
그렇지만 내게 그 하루이틀도 허락되지 않는걸.
목구멍 아래로 그 한마디를 쑤욱 밀어 넣었다. 나의 연인이 들으면 슬퍼할 것이므로.
사실 그 하루이틀을 허락하지 않는 건 나 자신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과거의 나다. 내 능력을 과신하여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책임감으로 족쇄를 채운다. 그럼 분명히 과신한 만큼 성장하기는 한다. 그렇기는 그런데, 내 능력 이외의 모든 것은 닳고 만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너덜해진 것일까?
작년 겨울에는 바다에 가고 싶었다. 푸른 동해가 보이는 숙소에서 일주일 정도만 푹 쉬다 오고 싶었다. 재작년 겨울에도 그랬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부산이나 갈까 싶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올해 가을이 시작할 즈음에는 전망 좋은 카페, 향이 좋은 카페에 가서 글이라도 푹 쓰다 오고 싶었다. 그러다 또 바빠서, 그럴 여유가 생기질 않아 그만두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을 몇 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몇 백번 억누르자, 끝내 '어떤' 감각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어떤' 감각의 상실로, 오히려 어른의 지위를 획득한 느낌이다. 이제까지는 아이도 어른도 아닌 모호한 상태였다면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 된 느낌이다.
그러므로 이 '어떤' 감각은 '개구리 올챙이일 적 생각 못한다'고 할 때의 그 '올챙이일 적'의 감각일 수도 있겠다. 반투명한 몸을 흔들어 시원한 개울을 헤엄칠 때 그 꼬리가 지닌 감각. 아늑한 수중에서 호흡하던 아가미가 지닌 감각. 지치는 날에는 물의 흐름에 나를 내맡기던 감각.
그런데 어쩌겠어. 난 이미 개구리가 되었고, 물길을 가늠하던 꼬리 대신 손과 발로 날카로운 현실을 더듬거리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비현실로 도피해 둥둥 떠다니는 것은 더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건 내가 하지 않는 게 아니고 하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꼬리와 아가미를 상실했으니까. 대신 손과 발과 목소리를 얻은 어른이니까.
그러니 개구리는, 개구리가 지칠 때 쉬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