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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Apr 23. 2021

인턴의 후임

자격지심 끝판왕

그곳은 마치, 제일제당에서 대한통운 사보를 만드는 느낌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계열사이긴 해도 엄연히 다른 회사이다 보니 팀 자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그래도 대기업 계열사라고 업무 강도는 그에 준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숨 쉴 틈 없이 일해야 할당량을 끝낼 수 있었다.


한 명은 팀장, 한 명은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은 대학생 인턴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턴의 후임이 되었다. 인턴이 하던 일 중에 하나를 내가 이어서 했다. 인턴은 많은 일 가운데 하나만 덜은 셈이었다. 사보 이외에도 홈페이지 내에 콘텐츠도 제작했는데 그 역시도 인턴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그래도 대기업 계열사라고 엄마가 너무도 좋아했으니 내게 주어진 일만 잘 하자, 생각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포토에세이란 코너에는 인턴의 행방을 묻고 인턴을 그리워하는 댓글들이 수시로 올라왔다. 인턴은 그런 댓글들을 큰 소리로 읽으며 너무도 좋아했다. 내 팬이야, 하면서! 팀장과 일러스트레이터도 그런 인턴을 막냇동생처럼 귀엽게 여겼다.


셋은 모였다 하면 나꼼O 이야기 '만' 했다.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동참하기 위해 굳이 찾아서까지 들었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영어로만 이야기해서 영어를 배워왔더니 이젠 불어로만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새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을 보면 게을러 보이더라.

인턴의 말에 팀장과 일러스트레이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두고 한 말, 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때의 나는 삐딱했다. 그리고 며칠 후 팀장은 인턴이 그동안 써왔던 글들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비슷하게라도 쓰라고.


대기업 계열사고 뭐고, 못해먹겠다! 더는.


 

인턴들의 회사


또 다른 회사! 여긴 스타트업보다는 대학생 창업 동아리에 가까웠다. 대표는 둘이었고, 둘 다 각자 다른 회사의 대표여서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면접 말고는  날이 없었으니. 사무실에는 스무  가량의 대학생 인턴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든 작업들을 인턴들이 해오고 있었던 듯. 그리고 이제야 그들을 관리, 감독해줄 팀장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턴들의 팀장 역시 인턴이었다.

일단은 인턴들의 팀장한테 일을 받아야 했다. 당장 궁금한 것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인턴들의 팀장뿐이었다. 사무실에는 그들밖에 없었으니까. 웃기게도 또 대리이기는 한 건지 내게 피드백을 부탁해왔다.


난 기본적으로 A4 용지 한 장을 쓰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이 세상 누구보다 느렸다. 글을 쓸 때만.

많이, 자주 써봤다고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시간 대비 엄청 잘, 쓰는 것도 아니어서 늘 문제가 됐다. 회사 입장에서는 빨리, 많이 쓰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인턴들은 달랐다. 빨리 쓰는 만큼 많이도 썼다. 내가 한 개를 겨우겨우 할 때 그들은 두세 개를 거뜬히 해냈으니. 비교가 됐다. 내가 봐도.


그들이 맞았다. 핵심은 상품이었다. 상품의 상세페이지를 보는데 누가 얼마나 문장을 보며, 새로운 표현에 감탄할까. 빨리, 많이 올려야 하나라도 더 팔 수 있는데 나 혼자 느리적느리적 소설 한 편을 쓰고 앉아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그 회사는 대표가 자리가 없어도 되는, 대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끌고 가야 살아나는 말 그대로 요즘 회사였다. 그런 곳에 내가 있었으니 부대낄 수밖에.


모처럼 잘 나왔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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