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에는 아이들이 정말 싫었다. 식당에서 돌고래 소리를 지르며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는 것도, 그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이 생떼를 쓰며 우는 것도... 같은 곳에 있는 것만으로 기가 빨렸다. 간혹 친구가 아이들과 함께 약속 장소에 나오면 몇 시간 만에 녹초가 되었다. 그때는, 엄마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방관하는 엄마를 책망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래서 맘충이라 욕하기보다는 원래, 그맘때 아이들은, 그렇다고 생각했고 딱 그때의 아이들이 그저 싫었다. 어찌 손을 쓸 수 없는,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해도 금방 또 그러고 마는 아이들. 나 같은 사람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이를 낳으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다 예뻐 보인다고? 아니 오히려 싫은 부분들이 더 명확해졌다.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아이들이 있다. 가령 어른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려는 아이? 곰살맞기보다 당돌했던 그 아이는 OO엄마,라고 부르면서 다가와 아이 근황에 대해 묻곤 했다. 겉모습은 아이인데 말하는 게 꼭 어른 같아 매번 주춤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해주지만, 대화도 되지만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과 말도 되지 않은 말이라도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할 때가 제일 아이답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예쁘다.
요즘에는 유난히도 똑똑한 아이들이 많다. 네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의 종을 알고 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가 하면, 화단 구석에 핀 희귀한 버섯의 이름까지도 줄줄 읊는다. 여치인지 메뚜기인지 사마귀인지 어찌 저리도 잘 알까 싶다. 어떤 아이들은 벌써 한글을 읽고 영어를 말한다. 이건 OO라고 적혀있어, 하며 다정하게 알려주는 아이가 있는 반면 아는 걸 잘난 척하며 너는 이거 모르지? 하며 우쭐대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는 정말이지 너무 얄밉다.
영어 교재였나, 학원이었나? 한 광고에서 여섯 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영어로자기소개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그걸 볼 때마다 채널을 돌리며 그렇게도 욕을 했었다. 아 정말이지 너무 꼴 보기 싫었다.지극히도 개인의 취향이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지금, 어쩌면 당연한 건데도 그 작은 아이가 영어로 말하는 게, 발음이 원어민 같았던 게 그저 못마땅했다. 그런 비슷한 류의 광고는 지금도 나오고 있다. 이제 막 말을 시작하는 아이가 나와 낱말 카드를 보며 영어로 동물 이름을 기가 막히게 발음하는 것 역시도. 그런 식으로 광고를 해야 부모들이 결제를 하나? 네 살 아이가 길가의 낙엽을 보며 시나브로 낙엽이 쌓이네,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마치 그런 느낌이다.
연예인들의 어릴 적 사진들을 쭉 나열해놓고 '육아 난이도 최상이었을 아이돌'이라 제목을 붙인 글(유머)을 종종 보게 된다. 대개 눈빛이며 몸짓이 장난꾸러기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들의 부모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란 생각이 먼저 들며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이는 건 나 또한 엄마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이만은 제발...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게 된다. 아들인 것만으로도 체력이 남아나지를 않는데, 엄마의 상태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눈앞에서 까불대면 그땐, 하아, 쟤를 어쩌지 정말? 싶을 것 같다. 아, 그들의 엄마는 또 그런 면이 귀여울 수도 있으려나?
맘 카페에서 이런 글을 봤다. 아들 둘을 키우는데 둘 다 아빠의 피를 물려받아 지상 최고의 장난꾸러기라고 했다. 보통 한 명이 장난꾸러기면 다른 한 명은 얌전하다는데 그 집은 둘 다 그랬다. 밖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엄마를 안쓰럽게 바라볼 정도라고. 대체 나 혼자 왜 이 죄를 다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남자의 어릴 적 이야기를 꼭 들어보고 결혼하겠노라 다짐하는 글이었다. 아는 아이 역시 장난꾸러기인데 그 엄마는 매일 누군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 장난이 꼭 누군가를 다치게 했으니... 사실 그렇게 다치면 아이를 탓할 수도 없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안타깝지만, 우리 아이가 다치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가는 수밖에.
내 아들을 누군가가 나처럼 어떤 부분을 콕 짚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상처 받을 거면서... 나란 사람은 어쩌면 그 사람을 향해 지상 최고의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른다. 속으로. 아이를 낳고부터는 더욱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왜 꼴 보기 싫을까? 왜 굳이? 란 말만 수백 번을 되뇌었다.
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나대는 사람을, 한국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영어로 하는 사람을, 괜히 더 발음을 굴리는 사람을, 싫다는데도 눈치 없이 자꾸 장난치는 사람을, 잘난 척하는 사람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아이도 인격체로 존중해줘야 한다고들 말한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 것도 같은 게, 부모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타고난 성향은 어쩔 수 없다는 것. 아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향이 그런 거다 그냥. 그러니 따지고 보면 아이가 싫다기보다 그런 사람이 싫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마지막은 역시 합리화!
내 아이는 마냥 사랑스럽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딱 그맘때 아이의 싫은 부분들이 있는데, 엄마이다 보니 그게 전부는 아닌 걸 아니까 한편 이해를 해줄 뿐이다. 다른 아이들을 우리 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는 없냐고? 그 정도의 성인은 아쉽지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