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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May 28. 2022

좋아하는 계절 속 좋아하는 기억

토요 글쓰기 모임 [끄적이는 소모임] #2

22.05.28


여름이었다.라고 적혀진 글귀를 보면 마음이 부드럽고 차분해진다. 아주 고요하고 싱그러운 기억들이 물결처럼 떠올라진다. 그 계절 특유의 더운 바람과 약간의 땀방울, 시원한 비의 기간 속에서 이루어진 기억들이 ‘여름'이라는 단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내가 처음 여름을 가슴 깊이 들이쉰 것은 아마 고등학교 삼학년 여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나는 친구와 책을 서로에게 추천하고 돌려 읽는 걸 즐겨했다. 그렇게 읽은 책 중에 한 권이 이상문학상 작품집 중 하나인 ‘몬순'이다. 책의 이름과 동일한 편혜영 작가의 대상 수상작인 ‘몬순'은 사실 한참 뒤의 지금으로서는 내용이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그저 내가 그 단편을 읽었을 때의 감정과 분위기만 한참 동안 남아있었을 뿐이다. 긴 우기와 짧은 건기로 이루어진 열대 몬순 기후. 그래서인지 그 당시 한여름의 나는, 어딘가의 열대우림을 생각했고 회색빛의 긴 우기를 떠올렸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그래서 찝찝한, 오로지 빗소리로만 이루어져 어쩌면 고요하게 느껴지는 회색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풍경이 좋았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나는 일 년 대부분이 여름 더위로 이루어진 곳에서 오 년을 살게 되었다. 한여름 더운 온기 속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낮이 아주 길어서 퇴근 후에도 한참이나 해를 즐기고, 시원한 계곡물에서 물장구를 치며 그 모든 순간에도 나는 회색빛 우기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어느 날은 그 당시 살던 나의 원룸 안에서 장마 빗소리를 들었다. 방 한쪽 구석에서는 ‘rain’이라는 피아노곡을 켜 두었었고, 날이 흐려서 그런지 한낮인데도 불을 꺼두면 조금 흐린 모습이 되었다. 나는 작게 스탠드 조명을 켜 두고 집안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혼자인 주말을 만끽하며 한없이 늘어졌다.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비만을 느꼈던 그 순간은 그때는 몰랐지만 한참 동안 편안한 기억이 되었다.


물론 비가 오는 날만 가득한 게 아니다.


또 다른 내 기억을 꺼내보자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을 하다가, 어느 토요일 아침에는 문득 필름 카메라를 챙겨 도시 한가운데 있는 식물원에 갔다. 이른 주말 아침이라 식물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 바퀴를 다 도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곳에서 드뷔시 음악을 에어팟으로 들으며 걸었다. 태평양 서부의 섬나라답게 하늘 높이 뻗어있는 야자수가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었고, 가끔의 새소리와 어디선가 들리는 분수대의 떨어지는 물소리를 걸으며 1퍼센트의 불안도 없는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 썼던 나의 글을 가져왔다.


가끔은 혼자 걸어도 좋다

아무 방해 없이 내 발끝에 집중하고 햇빛과 나무 그림자 사이를 걷다 보면 모든 고민이 사소하게 느껴지곤 한다


누구나 가끔은 허무할 때가 있다

왜 존재하는지 왜 생각하는지 왜 일을 하는지

왜 울어야만 하는지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좋아하는 곡을 틀고 혼자 걸으면 좋겠다

밤이든 낮이든 아침이든 걷다가 지치면 벤치에 앉아서

햇볕이든 달빛이든 느꼈으면 좋겠다

당신도 나도

온 여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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