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이면에 대하여
낡아버린 왕진가방,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간호사복, 어딘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는 몽환적인 장치들은 현대의 병원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마리아 사랑병원’은 오래되어 누수 되었지만 방치되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 엑스레이 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로 영화는 시작된다. 누군가 몰래 그 장면을 엑스레이로 찍어 병원 중앙에 전시까지 해 놓고 만다. 이 사건을 맞닥뜨린 후 사람들은 누가 이 사진의 주인인지에 대한 설전을 나누는 집단과 이 사진의 주인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마음을 가진 집단으로 반응이 나뉜다. 그 불안감에서 오는 어쩌면 그것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은 막연한 것이다. 애초에 뼈 사진을 보고 주인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불안감이 키운 의심은 자꾸만 의문스러운 조각들을 스스로 조합해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느끼게 되어버린다. 간호사 윤영은 그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과 남자친구 성원이라 생각해 결국 일을 그만 둘 생각까지 하게 된다. 실제로 그 사진의 주인이 윤영인지 아닌지에 대한 증명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 누가 이런 사진을 찍어 남의 사생활을 들춰냈는지도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끝내 가해자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고 피해자로 의심받는 윤영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상황에 봉착한다. 그리고 다음날 병원 사람들 모두 출근을 하지 않으며 모두가 그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내비친다. 행여나 자신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 될까 두려운 것이다.
이 소동 안에서 진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진실이 어디 있나 보다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타인에 대한 의심으로 무마시켜 버린다. 소문은 그 자체로서 서사적 구조를 가진 개념이기도 하다. 소문의 사실이 진실인지 허위인지를 떠나 그 자체로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와 다른 점이라면 소문은 전하는 사람에 의해 사실이 편집되고 없던 사실에 살이 붙는다는 것이다. 공론화된 소문이 없었다면 의심으로 그칠 수 있는 생각들이 소문을 만나며 진실로 위장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추측으로부터 쉽게 그 사람을 판단하고 의심하며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미 달아나버린 온전한 사실 대신 편집된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이 진실로 둔갑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오해를 견디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면서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오해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 ‘오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진실이 흘리고 간 누군가의 이기심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세상에는 참 아이러니한 순간들이 많다. 예기치 못하게 일어나는 사건을 마주할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근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다가오기도 한다. 도심 곳곳에 갑자기 생겨난 씽크홀은 국가적 재난이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백수였던 성원은 일자리를 얻게 된다. 갑자기 도시 한복판의 땅이 꺼져도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일터가 된다. 사회라는 문을 열었을 때 만나는 청년 실업이라는 벼랑 끝에서 또 다른 재난에 의해 구해진 것이다. 세상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도 여전히 일정한 시간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늘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덩이의 문턱까지 밀어 붙이는 건 외부적인 힘이 크지만 막상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건 내부적인, 즉 스스로가 발목 잡혀 빠져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는 플롯에서 소문보다 더 흔한 것은 오인일지도 모른다. 관계 사이에서 복잡한 심리전은 오인이 발단이 될 때가 많다. 오인은 의심과 한 쌍처럼 비례한다. 스스로가 단정지은 오인으로부터 시작하는 사유는 의심을 만나 더욱 커지고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 사유의 종착에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오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반지를 잃어버린 성원은 반지를 찾기 위해 스스로 의심이라는 구덩이에 빠진다. 동료의 발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자신의 반지라 확신한 성원은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의 확신만을 기반으로 의심을 키워나간다. 평소 같으면 흘려 들었을 법한 말이나 행동도 이미 품어버린 의심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동료를 도둑으로 몰아가면서 까지 받아낸 반지는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한다. 발가락 반지가 손가락에 맞을리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일 수도 있는데 무분별한 의심은 판단의 기준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인지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가. 반지를 찾기 위해 성원이 했던 행동들은 그것이 오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이미 스스로 단정 지은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자신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만을 찾게 된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곳을 얼른 빠져나와 타자의 시선에서 그것을 관망 하는 것이다. 구덩이를 빠져나온다는 것은 내면의 생각을 타자화 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오인과 의심을 키워나가는 것은 결국 내면의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