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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혜 Mar 20. 2023

나는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 가

슬픔과 분노보다 힘든 감정

Photo by Larm Rmah on Unsplash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고 느껴보고 또 여전히 외면(numbing) 하기도 하는 감정은 부끄러움 그리고 창피함(shame)이다. 이 두 단어의 교집합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것 같다. 도덕적인 부끄러움이 아니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해서 창피한 게 아니고 이런저런 상황에서 사람들로부터 크고 작은 불편함을 느낀다.


감정에 대해 배우고 이것저것 적용해 보면서 슬픔과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하고 흘려보내는 것은 꽤 익숙해졌다. 고통은 여전하지만 이제 슬픔과 분노가 찾아올 때마다 항상 도망가지는 않고, 그래 마주하고 흘려보내자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든 며칠 후이든. 그런데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흘려보내는 것이 더 어렵다. Therapist가 Shame은 sadness 나 anger보다 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했는데 그걸 들으면서 위안이 되었다. 내가 창피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감정에 의해 내 몸과 마음이 잠식되어 버린다. 고개를 막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마음속으로 욕을 하거나 혼자 있을 때 입 밖으로 욕이 나오려 하거나 유튜브 앱을 누르거나 침대로 숨어버리거나 음식을 찾는 등의 반응이 바로 따라온다.


나는 왜 창피함을 느끼는 걸까, 왜 나는 창피함을 자주 느끼는가? 궁금해왔다.

왜 말할 때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는가 내가 들을 때는 눈 맞춤이 전혀 어렵지 않음에도.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게 되면 눈 마주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발표할 때 강의할 때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면서 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보면서 눈을 마주치는 척 그만하고. 


눈을 마주치고 소통하는 것이 좋다 그 연결되는 느낌이 좋고 나도 그 느낌을 주고 싶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걸 누가 보는 것이 부끄러운 가? 왜 부끄러운가? 잘하고 싶어서 그럴듯해야 해서 완벽해야 해서 부족함을 보이면 안돼서? 

발표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싫고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항상. 초등학생일 때 엄마아빠가 내가 너무 숫기가 없다며 웅변 학원을 다니게 했었다 나는 너무 가기 싫었지만. 몇 주 동안은 일어나서 글을 읽는 것이 무서워서 싫어서 창피해서 울었다. 선생님이 시킬 때마다 그랬다. 울었다는 사실도 창피했다. 몇 달 뒤에 친한 친구가 학원에 등록해서 왔는데 긴장은 했지만 울지 않고 하는 모습이 놀라우면서 부러웠고 친구가 내가 맨날 울었다는 사실을 몰라서 다행이었다. 


30대가 된 지금 나의 웅변, 발표, 강의 등 말하기 전반의 능력은 나아졌다 물론. 수많은 미팅들과 발표들을 하고 강의를 여러 번 하면서 그 부담스러움과 고통이 무뎌지긴 했다. 가끔 잘했다고 느끼는 경우들도 있다 자랑스럽고 기분 좋다.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더 많다 더 준비하고 연습했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 나에 대한 자괴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말이 convincing 하지 않을 때, 무언 가를 보고 읽어야 할 때.. 그 느낌 싫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부끄러움을 포함한 모든 감정에 대한 생각들은 어린 시절에 내가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 진다. 말을 할 때 잘 들어준 기억이 있나? 나는 주로 들었던 거 같다 내가 말하는 경우는 물음에 대한 대답 또는 가끔의 질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말하는 것 가치가 있는 것이고 내 생각이 무엇이든 말해도 괜찮고 솔직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들으면서 자랐다면 지금 보다 더 말을 많이 할 것 같고 편하게 말할 것 같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이상한 사람으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멋있지 않은 사람으로 보일 까봐의 걱정은 훨씬 적을 것이고. 


혼나지 않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엄마아빠가 들었을 때 좋아할 만한 혹은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을 말들만 했던 것 같다. 가끔은 그런 의도로 대답을 했는데도 내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어서 혼나기도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어디 가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었고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을 가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답을 했고 아빠는 상업고등학교를 왜 가냐고 했다. 나는 그때 그 학교가 상업고등학교인지 몰랐고 상업고등학교 자체에 대한 개념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을 때이다. 억울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이 확 밀려왔다. 아빠는 거길 왜 가냐고 뭐라 하고 엄마는 거기는 상업고등학교잖아.. 아빠와 나 둘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몰랐다. 왜 아빠가 저렇게 말하는지는 그 순간 이해를 했는데 나는 일반 고등학교인 줄 알고 말했다. 상업고등학교에 진학 생각이 없었고 만약 있었다고 해도 가고 싶다고 절대 말 못 했을 분위기의 집안이다. 엄마아빠가 좋아할 줄 알고 말했는데 억울하고 짜증 났다. 그 감정도 표출하지 못하고 그냥 표정이 굳어진 채로 입을 닫았던 거 같다. 잘못한 거 없이 혼나는 기분은 정말 싫었다. 성인이 되어서 말하자면 기분이 더럽다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것보다는 더 감정을 실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런 식이 었다. 잘못을 안 해서 혼나도 나는 대체로 변명하지 않았다 더 크게 혼날까 봐 그냥 그 순간이 빨리 끝나길 바라서. 내 감정은 안 끝나도 그 상황이 끝나면 나는 안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된 기억들과 마주하고 원인을 찾다 보면 나도 말할 때 사람들의 눈을 볼 수 있게 될까? 말하는 게 편안해질 수 있을까, 부끄러움과 창피한 감정을 느껴야 할 때만 느낄 수 있게 될까.

Photo by Sinitta Leun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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