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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펑크마녀 Jan 08. 2024

폭설의 순간

시계를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7시 반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은 이미 7시였다.

6시 반에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다 7시에 출발하면 되는 것으로 완전히 착각해 버린 것이다.

다급하게 반지를 끼고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와 문을 여는 순간,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우산을 꺼내올 시간도, 잠깐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살 시간도 없었다.

입장은 7시 20분 마감이었고 우리 집에서 갤러리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30분은 걸렸다.

택시라도 잡아탈 요량이었지만 이런 눈길이라면 그건 분명 좋지 않은 생각일 것이다.

결국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길을 급히 걸어 도착한 지하철역에서 마침 곧장 들어온 지하철에 오를 수 있었고, 시작 시간에는 어떻게든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20분이 입장 마감이라고는 하지만 시작 전이면 아마 들여보내 줄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누가 이렇게 갑자기 내린 눈을 잔뜩 맞아 눈사람이 된 관람객을 입장할 수 없다며 되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지하철에서 내려 사정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들에 눈을 찔려가며 갤러리를 향해 최선을 다해 걸었다. 길이 미끄러워 뛸 수는 없었다.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는 30분 정각이었고 나는 모자와 재킷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예상대로 특별한 제지 없이 입장할 수 있었고 퍼포먼스는 그로부터 5분 정도 후에 시작되었다.

건반 앞에 앉은 그의 뒤로 까만 밤 창밖에는 여전히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눈 속을 걷고 있을 때는 추운지 몰랐으나, 난방이 되지 않는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에 앉아있자니 젖었던 옷이 마르며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쏟아지는 눈 속을 우산도 없이 걸은 게 얼마 만일까.

계단을 뛰어 내려와 문을 연 순간 까만 풍경 속 펑펑 내리던 눈을 마주친 순간은, 아마 꽤 오래도록 가장 문학적인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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