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일요일 미사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모든 이들이 그 순간만큼은 똑같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나이나 수입, 신분의 차이가 사라졌다. 다들 같은 기도문을 외우고 같은 설교를 들었다. 주디스는 일요일 아침이 되면 외로움을 젖혀 두었다. (101쪽)
여러분은 외로울 때 어떻게 하시나요? 그보다 어떨 때 외로움을 느끼시는지요?
살다 보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틈과 괴리에서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때, 혹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배신 또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면 외롭지요. 이처럼 ‘옆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제가 생각하는 외로움입니다. 게다가 경제적인 이유나 신분의 차이가 그 이유라면 참 서글프기까지 할 것 같습니다.
브라이언 무어의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은 주인공 주디스가 한 사람을 사랑하고, 다시 멀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주디스가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에서 주디스가 만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랜 기간 병간호하던 이모가 돌아가시고 새로운 하숙집에 머물면서 만난 자기주장이 강한 하숙집 사람들과 일요일 오후마다 찾아가 만나는 가식적인 오닐교수 가족들입니다.
이 두부류의 사람들은 주디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중에 처음에는 잘해주다 가진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르게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디스가 가진 것도 보잘것도 없는 처지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사람에게 주디스는 크게 상처받고 술을 먹게 되지요. 술이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술은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주디스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지요. 마음의 상처를 술이 낫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디스는 사람이 아닌 감정이 없는 '자그마한 단추가 달린 길고 뾰족한 신발'이나 대답 없는 신(성심)과 돌아가신 이모의 사진에 감정이입과 위안을 받습니다. 존재의 버팀목이며 희망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그 단추들이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다정한 눈빛으로
깜빡였다.(16쪽)
이 두 분이(이모와 성심) 내 모든 변화를 일으켜 주시잖아. 두 분이 나와 함께 있고, 날 지켜주고 있다면, 새로운 곳도 집이 되는 거야(32쪽)
이 문장을 작가는 소설의 시작과 끝에 배치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주디스가 귀의하는 곳이 자신 곁에 있지만 감정을 나눌 수 없는 것들이라 못내 아쉽지만 그녀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라면 이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네요. 다만 주디스를 둘러싼 상황과 현실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 안타까울 뿐입니다.
신경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고,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는 것이 아니니 그녀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주디스,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잘 지내고 건강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주) 서평 제목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는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중에서 따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