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양식 43 - 차가운 손을 맞잡아 줄 계절

아름다운 커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by book diary jenny


오늘도 어제처럼 맑음이 예상된다. 어제는 날씨가 아주 맑았다. 기분마저도 맑음맑음. 지금껏 날씨가 내 기분을 좌우한 적은 크게 없던 것 같다. 단 하나 이것만 조심하면 되는데, 난 겨울이 넘넘 무섭다. 얼마나 그러면 스스로 동면의 기간까지 만들까. 특히나 손이 차가워서 외출 시 너무 불편하고 심지어 살짝 아프기도 하다. 가죽장갑도 벙어리장갑도 아무 소용없는 이 괴로움.



내가 지금보다 더 철이 없던 연애 초짜 시절, 그의 회사 앞에서 퇴근을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요즘의 센스라면 커피전문점에 들어가서 따스한 커피를 마시며 페북(당시는 싸이월드?)을 하고 있었겠지. 시간이 되면 그토록 보고팠던 그이가 짠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저 데이트를 즐기면 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니, 그때의 맹하던 나는 그가 마칠 때까지 건물 안 엘리베이터만 힐끗거리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시간은 더디고 날은 너무 차가웠다. 데이트니까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곱게 입었다. 손이 차가운 나에게 그날은 특히나 더 고통스러웠는데, 마침 그날 입은 푸른색 코트는 주머니도 없던 것.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고, 기다리기로 한 회사 뒷문 쪽은 특히나 더 바람이 쌩쌩 부는 위치였다. 시간이 넘었는데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 손이 너무 아팠다. 한참 뒤 헉헉거리며 뛰어오는 그가 보였다. 날 보며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그만 눈에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훌쩍거리며 그랬겠지. "날 바보같이 이렇게 서있게 만들면 어떡해. 바보 다 됐잖아." "어, 미안. 많이 추웠지. 일 마무리가 빨리 안되어서. 미안해." 한참을 서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평상시의 나라면 그렇게 화낼 일도, 눈물 콧물 흘릴 일도 아닌데. "됐어. 날 바보 만들 거면 앞으로 시간 약속 자체를 하지 말아 줘." 해명을 하자면, 내가 폭발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를 자주, 많이, 그리고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그랬다. 나의 힘겨움은 기다리는 아픔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내 사랑의 크기가 그의 것과 균형을 맞추지 못할 만큼 내 사랑만 비대해진 게 아픔이었던 것 같다. "내손 만져봐. 차가워서 부러질 것 같아. 손 따뜻하게 만져줘. 나 너무 추웠어." 그러며 그의 손을 잡았던들 우리의 사랑이 길게 갔을까.



어제 오후 산책길에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젊은 커플의 어여쁜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 봐야 나와 10여 년 차이 날 텐데, 다정한 커플들을 보면 그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게 예쁜지 모른다. 내 아들들도 저렇게 다니겠지 상상하면 주체할 수 없는 엄마미소가 마구 떠오른다. 그 커플을 보다가 오래전 겨울날 그때가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손이 터질 듯 차가운 그때 그 계절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 슬슬 핫팩과 장갑, 무릎담요와 수면양말을 준비해야 한다. 추석이 지나면 날이 급격히 차가워지겠지. 추운 날씨는 날 번거롭고 힘겹고 괴롭게 만들지만, 서로 다가서고 서로 맞잡고 서로 안을 수 있는 최고의 시간들이기도 하다. "날 바보같이 이렇게 서있게 만들면 어떡해." 라며 울먹이던 내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런 나의 촌스럽지만 애틋한 미숙함이 있었기에 지나가는 연인들도 예쁘게 볼 수 있는 성숙한 마음도 생긴 거겠지.



이제 9월 중순인데, 벌써 추위 타령이라니. 내가 좀 그런가...


(포항바다에서 주운 예쁜 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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