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과 녹음으로 배우기
'좋아요'만 해서는 위험한 이유
언제부터인가 무엇에 대한 평가가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좋아요' 아니면 '싫어요' 둘 뿐이다. 원인은 포털 사이트나 유튜브 등의 원인이 크다고 본다. 어떤 사이트는 이 같은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다. 뉴스나 소식에 대한 반응을 '좋다'나 '싫다'가 아니라 '쏠쏠' '흥미' '공감' '탁월' '후속' 밖에 없다. 물론 그동안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이건 말하자면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다. 기사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만 유도하는 이유는 기사를 추천하도록 만드는 알고리듬 차원인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 역시 마찬가지다. 유튜브는 '좋아요' '싫어요'로 콘텐츠를 평가한다. 무심코 누른 우리의 반응은 '알 수 없는' 알고리듬으로 이어져 나에게 최적화된 콘텐츠를 추천한다. 문제는 모든 유튜브의 처음과 끝, 모든 유튜버들이 바라는 것이 '구독과 좋아요'라는 점이다. 구독과 좋아요는 해당 콘텐츠와 채널을 인기 있는 콘텐츠와 채널을 만드는데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창작자에게는 '좋다'는 피드백 만이 우리가 줄 수 있는 피드백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물리학에서 나온 말이다. 입력과 출력은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으로 그치지 않고 상호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아웃풋(output)이 입력(input)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출력에 의해서 입력이 변하는 물리 현상은 우리 주변 생활에서 반복된다. 어떤 결과에 대한 코멘트는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교육에서는 교사가 학습자에게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고, 심리에서는 행동과 반응의 결과를 본인에게 알려주는 것, 매체에서는 수용자의 반응에 대한 전달자의 반작용을 모두 ‘피드백’ 현상으로 본다.
전 대학교수이자 컨설턴트 한근태 작가는 ‘피드백’ 행위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자신은 말이 많아지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혹시라도 그런 행동이 나타나면 주변에 지체 없는 ‘피드백’을 달라고 말한다고 한다. 한 작가는 또 ‘반대의견’에 대해서는 <재정의>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반대의견은 조직을 사랑하는 충성심에서 나오는데 관리자의 70%가 회사 수장의 일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피드백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입을 닫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 한번 안 보이는 것은 아무리 봐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때 타인의 시각이 필요하다. 피드백이 없는 가정, 조직, 사회는 위험하다. 그렇다. 우리는 피드백에 대해 인색하다.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괜히 불편하기 때문이다. 막상 피드백은 현실 세계에서 잘 이뤄지지 않는다. 솔직한 피드백을 주자니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오해를 부를 것 같고, 그렇다고 형식적인 피드백(결국 칭찬에 머무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시애틀 대학의 교직원 개발 컨설턴트 테레세 휴스턴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드백은 세 가지 유형으로 하는 게 좋다고 제안한다. 감탄과 코칭, 평가이다. 첫째, 감탄은 한마디로 ‘좋았어!’ 칭찬해주는 것이다. 좋은 것은 좋았다고 해야 한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책의 원제는 ‘Whale Done!’이다. 고래도 해내는데, 인간이 못 해낼 것은 없다. 둘째, 코칭은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조심스럽다. 코칭은 전문가가 아니라면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코치가 선입관을 갖고 있는지는 않은지, 내 생각이 혹시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칭 전에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셋째,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잘 된 것과 잘 못된 것을 가릴 때는 평가의 잣대가 분명해야 한다. 어떤 기준에서 잘 된 것이 다른 기준에서는 잘 못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프에서 X, Y 축에 무엇을 뒀는지, 단위를 어떻게 뒀는지 평가의 대상에게 잘 설명해야 한다. 그게 피드백이다.
그러면 피드백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질까? 결론적으로는 아니다. 나 혼자 만의 피드백이 중요한 때가 있다. 바로 말하기와 글쓰기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는 <나는 말하듯이 쓴다>에서 주목이 재미없는 이유는 남이 보라고 하는 것과 내가 보고 싶은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기 부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은 다르다. 생각은 말로 표현된다. 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을 아무리 잘 표현해도 100% 글로 완벽하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완벽하지 않은 그만큼이 내 말을 듣는 사람과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오해하고 왜곡할 가능성이 있는 가능성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고, 내 말을 다시 들어보는 피드백이 중요하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기는 쉽다. 초고와 퇴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글을 다듬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일필휘지로 쓴 읽기는 꼭 다음날 아침에 읽었을 때 느낌이 다르다. 일기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쓴 글은 퇴고를 거친다. 중요한 글을 다른 사람에게 한번 읽어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하기는 어떨까? 수십 년 방송을 한 사람들도 발음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중요한 녹음을 앞두고는 펜을 입에 물고 말을 하기도 한다. 하나 더. 발음보다 더 중요한 건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인데, 이걸 잘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직업적으로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나 말을 잘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는 것을 일의 과정에 두는 사람이 많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자. 거의 대부분 주어가 없거나, 목적어에 서술어 정도만 나와도 의사소통이 된다. 맥락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위해 말을 하거나, 발표를 하거나, PT를 하거나, 방송을 할 때 등 불특정이나 특정 다수를 상대를 말을 할 때는 말 잘하는 사람들과 못하는 사람이 확연히 구분된다. 잘하는 사람들의 말은 차이가 있다. 주어와 술어가 분명하고 말이 짧게 이어진다. 결론이 앞에 나오고 이유가 뒤에 나온다. 듣는 사람이 그만큼 따라가기가 쉽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말은 특징이 있다. 첫째, 말이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듣는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길다면 집중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둘째, 처음 시작한 주어와 말의 결론이 다르다. 시작과 끝이 다르다. 말을 할 때 두서가 없다. 두서(頭緖)는 일의 처음, 실마리, 차례를 의미한다. 두서가 없는 말은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막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 결론은 항상 다른 곳으로 간다. 중간에 누군가의 질문이라도 끼어들면 더 산으로 간다. 이럴 때는 차라리 메모를 해놓고 말을 하는 게 낫다.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말을 들어도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결론이 뒤에 나오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서술어(결론)를 먼저 말하는 영어식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부연 설명은 뒤에 나온다.
나는 과연 어떻게 말을 하고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전화기의 녹음 기능을 활용해보자. 그리고 비교적 덜 친한 사람들과 나의 대화를 한번 녹음해서 들어보자. 내 말이 의외로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기 쉽다. 차근차근하기보다는 결론이 먼저 나오고, 속도를 내고, 중요한 단어가 빠지고 뒤죽박죽이 된 나의 말이 없다면, 그래서 상대가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일단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