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게는 딸이 있다. 나에겐 유일한 조카다. 16살. 중학교 3학년 나이지만 제주도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 다니는 까닭에 가을이면 9학년이 된다고 한다.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조카를 볼 기회는 없었다. 아주 어릴때 가끔 봤을뿐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엔 사진으로만 봤다. 그런 조카가 글을 썼다. 전형적인 이과생인 형이 연락 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나?”
“뭔데?”
“OO이가 형수랑 나를 거실에 앉혀놓고 자기가 쓴 글이라며 읽더라고... 아주 긴 글을 아주 오랫동안...”
“무슨 글인데?”
“(중략) 근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혹시 프린트 할 수 있나?”
“어 보내봐”
“절대 휴대폰으로 봐서는 이해할 수 없으니 출력해서 읽어봐. 종이로 출력해서 천천히 읽어봐야돼”
“오키”
scene 2. 조카의 글
그렇게 받은 조카의 글은 워드(10pt.) 7장 분량의 생각보다 긴 글이었다. 제목은 <감정의 바다>. 조카의 글은 왠지 좀 낯설었다. 익숙한 나의 글쓰기, 글감, 단어들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뒤에 알게됐지만 영어로 쓴 걸, 다시 번역한 거라고 했다. 이해가 됐다.
조카는 더이상 내가 알던(정확히는 상상했던) 16살 여중생 OO이가 아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았다. 조카의 부모(전형적인 이과생이자 같은 직업인 형과 형수)가 느꼈을 당혹감이 이제는 이해됐다.
바다, 파도,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흰색, 검정색 등 조카의 단어라고 생각하기에 전혀 이상함이 없는 단어에서 부터...
감정, 영혼, 피, 무의식, 희망, 당혹감, 불행, 혐오, 비명, 피투성이, 사슬, 두려움, 희망, 열정, 힘 등 나의 단어라고 생각됐던 단어들이 16살 조카의 글을 채워나갔다.
한글이 익숙치 않은 16살 여중생의 글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했다. 두 번을 읽고 크게 쉼호흡했다. 평생 글 좀 쓰고,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 부모로부터 해석의 임무가 맡겨진 삼촌이 자칫 그 뜻을 오역하지 않을까... Z세대의 글쓰기를 자칫 X세대의 고지식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단하지 않을까... 몇 번의 망설임 끝에 1페이지 피드백 감상문을 써서 형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이렇게 썼다.
<감정의 바다>를 읽고 (from uncle)
인간의 감정을 바다와 색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묘사하고 투영해낸 수작으로 생각됩니다.
한 개인이 느끼는 내면 깊숙한 곳의 다양한 감정을 붉은색(나를 괴롭히는 무엇으로 묘사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피할 수 없는 운명, 인연, 내가 바꿀 수 없는 환경), 흰색(행복, 희망이지만 역설적으로 만약 나에게 좋은 것만 주지 않고 때로는 상처를 남김)으로 묘사하며 출발합니다.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감정을 색상이 칠해지기 전의 무의 단계인 검은색으로 표현하고, 무슨 색깔이 어떻게 칠해지고 더해질 수 있고 출렁인다는 점에서 바다라고 말합니다. 감정의 바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의 색깔이 항상 잔잔하게 있지 않다는 점에서 표현할 수 없는 색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파도로 다가옵니다.
사실 내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색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았던 눈에 띄는 색상은 어쩌면 나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본능을 목이 꺾여도 비명을 지를 수 없고, 나를 으스러질듯 안아준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나의 본능은 내가 피할 수 없고 항상 나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주변은 다시 붉은 색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푸른색은 그리움이자 행복입니다. 결국 푸른색은 과거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기억은 푸른색일 때가 많습니다. 불안의 현실을 살다가도 과거를 기억하면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은 존재하지 않고 과거의 희망 속에서만 살고 싶지만 현실의 감정이 언제나 뒤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그리움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고난의 현실을 이겨냅니다. 과거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후회와 미련, 증오와 질투, 악한 향의 파도는 나를 괴롭히지만, 이제 나는 더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불행은 입꼬리가 올라갈 때쯤 찾아온다는걸 모르던 철없던 나는 감히 행복을 쥐어버렸을때 뺐겼고 다시는 닫지 못할 위치로 더욱더 강한 밧줄로 말라 비틀어져서 굳어버린 살을... (중략)...밧줄을 소리 지르며 찢기 시작했다.”
만연체의 이 문장은 이 에세이의 수작입니다. 이제 운명의 고리를 끊은 나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나를 구속하는 감정의 사슬과 파도에서 벗어나 안정을 회복합니다. 뭐라 형언할 수 없었던, 한 여름 밤의 꿈과도 같은 감정의 파도와 소용돌이를 겪었는데 알고보니 사후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나를 속박했던 운명에서 자유롭게 헤엄쳐서 오늘을 살 수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많은 색 만큼 그 색상이 주는 감정은 나 자신입니다. 무섭도록 싫은 색상도 한없이 좋은 색상도 서로 다른 모습의 내 감정이며 결국 그건 나 자신입니다.
<감정의 바다>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 내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잘 서술해 낸 OOO(조카)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형에게서 카톡이 왔다.
“해석이 멋지네”
며칠 뒤 정말 오래간만에 형님네와 조카, 우리 부부가 저녁을 함께 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조카는 어느새 훌쩍 커 있었다. 형수도 조카 에세이에 대한 나의 피드백 감상문을 보고 비로소 딸의 글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비로소 내가 나름 실수를 하지 않은 듯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난 16살 조카의 글에 손을 대기 보다는 그 독창성을 살리고, 해석의 왜곡을 피하기 위해 몇번이고 다시 읽어 깊게 이해하려는 방향을 택했다. 다만, 한 줄만 더했다. 그게 영어식 문장에서 왔던, 글의 내용상 의식의 흐름을 이어가는 만연체가 적합했을 수도 있지만, 문장이 조금 짧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생각일뿐 정답은 아닌 것 같다고 다시 말을 더했다. 내 글에 대한 퇴고도 어렵지만 남의 글에 대한 피드백은 훨씬 조심스럽다. 그리고 또 배운다. 배움의 대상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중학생 조카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