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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라멜 Aug 29. 2023

난 '우아한 냉혹' 같은 말을 만들 수 있을까

시오노 나나미의 스타일(style) : expressive

한 인간을 한 단어로 요약한 시오노 나나미


'우아하다'는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사전적 의미를 빌리자면 고상하고 기품이 있다는 뜻입니다. 차림새나 자태를 설명할 때 쓸 수 있지만 우아하다는 단어를 붙여서 좀 어울리려면 적어도 박물관에 있는 도자기나 미술 정도는 돼야 그 맛이 납니다. 그만큼 우아함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 기준은 높습니다.


'냉혹하다'는 한자 의미 그대로는 차가움이 심하다는 말입니다. 차가운 마음을 지녔다는 말입니다. 냉혹한 사람은 인간미가 없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부자간의 천륜이 있는데 어찌 그리도 냉혹하십니까" "그는 냉혹하게 국가와 황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하려 했다" 같은 문학 작품의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아하고도 냉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추기경 자리를 버리고 이탈리아 정복을 꿈꿨던 '체사레 보르자'입니다. 그를 우아하고도 냉혹하게 만든 사람은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입니다. 추기경이었던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이후 자신도 대주교와 추기경이 됩니다. 마키아벨리하면 모르는 사람 없으실 겁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정치학자입니다. 혼란의 시대에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군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위해 <군주론>을 집필했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등 그가 남길 말들이나 군주의 덕목은 강함을 상징합니다. 후에 이른바 '마키아벨리즘'하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대학 다닐때 정치학 시간에는 마키아벨리가 단골 메뉴였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냉혹함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모델로도 알려진 체사레 보르자가 여전히 살아숨쉬는 것은 우아한 냉혹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냉혹한 지도자 체사레 보르자, 군주론의 모델 체라세 보르자, 마키아벨리가 사랑한 체사레 보르자... 어떻게 쓰더라도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의 맛이 살지 않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발굴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작가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오노 나나미는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라는 멋진 말을 1970년 세상에 선보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거침없습니다. 그녀는 1937년생입니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글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물론 저자의 방대한 연구와 취재가 그 밑바탕이 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짧은 문장에서 나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5~7백년 전의 지중해 시대의 이야기를 살아 숨쉬게 하는 비결은 생생한 묘사와 설명에서 나오지만 결코 길고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통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상황이나 인물을 설명하려면 길어지기 쉽습니다. 동시에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서두르지 않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없습니다.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짧은 문장 하나로 로마를 그렇게 잘 표현한 말은 없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뒤집습니다. 로마 당시의 인프라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기보다 모든 길은 로마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이미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혈관처럼 제국 전역에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로마 가도망도 로마를 기점으로 하는 아피아 가도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인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2002, 한길사 p.77)


그리스와 로마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로마 시대에 길 만큼이나 잘 정비되었던 수도를 비교하기 위해 히포크라테스를 불러왔습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 우리에게는 그냥 비슷해 보입니다. 잡힐듯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래 문장을 보고 나면 확실히 잡힙니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를 낳았으면서도 상하수도에는 무관심했던 그리스인. 

의학도 의료도 그리스인에게 맡겨놓았지만 상하수도를 정비하는 데에는 열심이었고, 게다가 공중 목욕장까지 만들어 신체의 청결을 유지하는 데 집착한 로마인. (같은 책, p.255)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잘 읽힙니다. 누구나 아는 말이나 인물을 데려오지만 작가의 문장은 상투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습니다.  프랑스말로 하면 '클리셰(Cliche)'가 없습니다. 작가가 남긴 많은 에세이들은 첫문장에서 독자들을 유혹합니다. 제목과 첫 문장이 비슷하거나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지레 짐작된다면 흥미는 떨어집니다. 제목이 소설 전체의 주제를 함축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으려면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 첫 문장에서 남긴 정도는 돼야 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르는 잘못은 국제정치에서는 흔해빠진 '마찰'의 원인과 지극히 비슷하다."

이 한 문장을 보면 다음 문장이 궁금해집니다. 


"현실주의자가 잘못을 범하는 것은 상대도 현실을 직시한다면 자신과 같은 판단을 할 것이니 잘못을 범할 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다." (남자들에게 2판, 2002, 한길사 p.247)


첫 문장은 작가의 문장, 다음 문장은 5백년 전 마키아벨리의 문장입니다. 작가는 남녀 간의 관계를 마키아벨리가 남긴 정치에 대한 해석과 절묘하게 비교했습니다. 제 전공이 정치학이라 더욱 이 문장이 생생하게 다가왔는지는 모르지만 무릎을 탁 쳤습니다. 남녀 관계를 묘사한 글이 많은 만큼이나 국제정치에서 국가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이론들도 많습니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게임 이론 등 각종 이론 가운데 갈등을 유발하는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상대를 '오판'하는 경우입니다. 작가의 두 문장은 오판이라는 주제로 절묘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이해도 쉽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탈리아를 숨쉬게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부터 5~7백년 전의 르네상스 시대에 주목하고 인물들을 하나씩 소환합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동시대인이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종교가 세상을 지배했던 중세를 흔히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웠던 암흑기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중세를 이해하는 키워드 교황을 '신의 대리인'이라고 말합니다.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이었지만 신의 대리인을 차저했던 교황을 이해하고 보니 중세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비이성적인 행위와 전쟁들이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역사는 결과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과정은 우연의 연속입니다. 인과적으로 보이지만 한 인물의 자리에 다른 인물이 있었다고 해서 변화가 많을 것인지 적을 것인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인류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시오노 나나미의 스타일(style)입니다.


일본에 시오노 나나미가 있다면 한국엔 박경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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