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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Apr 15. 2023

해방을 위한 드라이브

영화 <델마와 루이스>


*본문은 <델마와 루이스>(1991)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델마와 루이스>는 내 인생 첫 로드 무비다. 윤가은 감독의 <콩나물> 같은 귀여운 모험 영화를 제외하면 나는 모험 영화, 로드 무비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유는 하나다. 재미가 없어서. 남성들 위주의 ‘알탕’ 영화를 보기 싫어서. 미국 서부 영화의 감성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서. 그런 내가 <델마와 루이스>를 본 이유는 딱 하나였다. 가부장적인 사회에 억압당하던 여성 둘이 자유를 찾기 위해 단 한 번의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내가 앞서 열거한 로드무비가 재미없는 이유들에 정확히 반대되는 로그라인을 보고 이 영화는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영화를 봤다. 룸메이트가 본가로 떠나고 홀로 남은 기숙사에서 아이패드로 왓챠를 틀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코가 빨개진 채로 눈을 자꾸 깜박거리며 영화 속 인물들, 델마와 루이스를 응원하게 되었다. 그들이 나누는 애정과 연대, 우정에 감동해서 영화가 끝나고도 탄성을 내뱉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로드무비. 나는 배우와 감독에게 박수를 치는 심정으로 침대에 내려와 마인드맵 사이트 ‘Coggle’을 실행했다. 바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영화의 로그라인은 다음과 같다. 보수적인 남편을 둔 델마와 텍사스에서 강간당한 적이 있는 루이스는 여행길에 그들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을 살해하고 경찰을 피해 도주한다. 설정부터 흥미진진하다. 보수적인 남편을 둔 델마, 텍사스에서 강간당한 적이 있는 루이스. 이 두 사람은 가부장제와 강간 문화 안에서 억압받고 있는 여성을 두 갈래로 표상한다. 또한 이 영화가 ’해방‘을 위해 전진한다는 것을 캐릭터 자체로, 캐릭터의 온몸으로 드러낸다. <델마와 루이스>는 제목 그대로, 캐릭터가 곧 주제가 되는 영화인 것이다.


영화의 설정은 곧 3개의 막으로 이어진다. 우선 1막을 살펴보자. 1막은 델마와 루이스가 함께 휴가를 떠나던 중 그들을 성폭행하려는 강간범을 살해하고 경찰을 피해 도주하는 것이다. 1막에서는 루이스가 강간범을 총으로 쏜 이유가 단순히 델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이때까지 루이스에 대한 정보는 그녀가 재미없고 바쁘기만 한 가게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한다는 것뿐이다. 델마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대충 가늠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전형적으로 멍청한 백인여자라는 것이 전부다. 초반의 영화는 오직 그 두 사람이 위기에 처했으며,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것만 관객에게 보여준다.


본격적인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2막에서부터다. 2막에서 루이스는 남자친구 지미에게 돈을 송금받지만, 델마와 하룻밤을 보낸 제이디가 그 돈을 모두 훔쳐 달아나면서 위기가 심각해진다. 델마는 자신의 실수를 갚기 위해 강도짓을 하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들을 성희롱 하는 트럭 운전사의 트럭을 폭파시키기도 한다. 여기서부터 델마와 루이스의 진짜 캐릭터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리숙하고 남성 의존적인 줄 알았던 델마는 사실 대담하면서 침착한 강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루이스가 텍사스에서 강간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부터는 왜 그녀가 ’우발적으로‘ 강간범에게 총을 쏘았는지가 설명된다.


앞서 이 영화는 캐릭터가 곧 주제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살펴보려면 델마와 루이스가 각각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가부장적이고 고지식한 남편 곁에서 옹송그려 살았던 델마는 사실 가부장제를 탈출하는 순간 그 누구보다도 대담하고 거칠어질 수 있는 여성이었다. 델마를 지키기 위해 총을 쏜 줄로만 알았던 루이스는 사실 강간 피해자였고, 강간 문화 안에서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부장제로 인한 피해를 겪고 있었고, 이 억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기 위해 여행 아닌 ‘여행’을 계속해 나간다. 바로 여기서 ‘여성 해방’이라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가 드러난다.



이 해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델마와 루이스가 그들을 성희롱 하는 트럭 운전사의 트럭을 폭파시킬 때다. 영화에서는 앞서 2번 정도 델마와 루이스가 트럭 운전사의 성희롱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 번째는 다르다. 델마와 루이스는 여러 경험을 통해 한 차례 성장을 겪었고, 더 이상 가부장제와 강간문화 앞에 태연한 척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당히 트럭 운전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자신들이 충분히 그 자체로 위협적인 존재이며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표방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총에 맞은 트럭이 펑! 하고 폭파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인 이유다.


해방을 위한 레이스는 3막에서 절정을 맞는다. 델마와 루이스는 결국 경찰의 추격에 의해 포위당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느냐 아니면 경찰에게 잡히느냐의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다시 말하면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냐, 아니면 가부장제에 순응하며 살 것이냐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이 두 선택지 앞에서 델마는 루이스에게 키스하며 ’완전히 떠나버리자‘고 말한다. 즉, 태어나 처음으로 즐겨볼 수 있었던 이 해방 여행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여행의 마지막까지 엑셀을 밟으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어느 때보다 깨어 있는 것 같아.


<델마와 루이스>가 좋았던 이유는 이 영화를 보는 나 역시도 ‘어느 때보다 깨어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탄탄한 3막 구조와 재미있는 로그라인도 물론 좋았지만, 이 영화를 본 한 명의 여성으로서 소감을 말하면 영화로부터 굉장한 응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내 안에는 델마처럼 가부장제 앞에서 주눅 드는 성격도, 루이스처럼 언제 강간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그 모든 두려움을 당당히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이 억압들, 나도 모르는 사이 쌓여 있는 부조리 사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들도 해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1991년에 개봉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떻게 감독은 2023년까지 이어져 올 수 있는 감성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탄탄한 구조와 그 위에 쌓아 올린 설정, 스토리 모두를 더해 여성을 향한 믿음과 동력이 이 영화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다. 언젠가 내가 이 세계의 부조리함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날 이 영화를 다시금 찾게 될 것 같다. 1991년, 델마와 루이스가 2023년의 내게 보내는 메시지를 찾으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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