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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May 05. 2023

비평이란 무엇인가

1) 들어가며     


비평이란 무엇인가.


위 주제를 받았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비평이란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는 일’이었다. 비평의 사전적 의미가 사물의 선악(善惡), 시비(是非), 미추(美醜)를 평가하여 그 가치를 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평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공평하게 따지는 일을 의미한다. 판단, 재단, 재판을 뜻하기도 하고 판단 작용과 선택이라는 의미 역시 비평은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작은 의미에서의 비평이란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미추와 선악은 어떻게 구별될까? 미추와 선악의 구별만이 한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어떤 작품이 일부러 ‘추(醜)’를 추구한다면 그 작품은 추한 것이고, 작품이라 불릴 수 없는 걸까? 관객은 어디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걸까? 선악은 어떻게 구별될까? 악인(惡人)을 다룬 작품은 아름답지 않은가? 선(善)을 추구하지 않으면 작품이 되지 않는 걸까? 선(善)이란 무엇일까?

비평의 범위는 이 질문들에서부터 커지기 시작한다. 하나하나가 모두 비평의 범위를 넓히고 비평이 비평일 수 있는 지점을 모호하게 만드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질문들에 답을 해가면서 비평의 의미와 역할을 문학적, 예술적 관점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비평이 대표적으로 쓰이는 분야가 문학과 예술이기 때문이며, 문학과 예술 비평을 통해 오늘날의 비평 대부분이 만들어진 까닭이다. 따라서 작은 의미에서부터 비평의 의미와 역할을 시작해 큰 의미에서의 비평이란 무엇인지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술의 의미를 찾는 비평

 

일반적으로 예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문학, 미술, 음악, 조각 등, 예술은 그저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예술작품을 보거나 듣고, 감상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언제나 관객에 의해 재해석되며, 고정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비평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예술작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 예술이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 비평은 바로 이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비평이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라는 의미를 넘어 예술의 진리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된 인식 비판적 예술철학이라고 했다. 즉 벤야민에게 비평은 예술이 철학 못지않게 요구하는 작품의 진리를 밝혀주어야 하는 철학이었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평은 평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평은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 사실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작품이 그 자체로 담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관객은 이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을 통해 반성하고 사유할 수 있으며, 이것이 예술비평의 목적이다.


이때 진리란 무엇일까? 앞서 예술작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예술작품은 보는 이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제각각 의미가 다르다면 그들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움과 추함 역시 다르고, 선함과 선하지 않음 역시 다르다. 하지만 단 하나, 관객이 예술작품을 보고 성찰과 반성을 한다는 점만은 동일하다. 예술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현실 세계를 재현(再現)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재현된 세계를 보면서 우리의 현실 세계를 재인식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보며,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과 세계를 성찰하고 반성한다. 그리고 성찰을 통해 관객은 그동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겨져 왔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진리의 탐구를 앞당겨 주는 것이 바로 비평이다. 비평의 역할은 예술작품을 해체하고 예술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관객을 통해 세계에 균열을 내는, 예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예술을 담은 채 존재하는 역할을 한다면 비평은 예술작품을 파고들어 예술을 꺼내고 관객을 통해 이 세계를 성찰하고 반성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평을 예술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3) 예술의 역사를 찾아주는 비평     


두 번째 비평의 역할은 특정 예술작품의 예술사적 사조와 그 위치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평은 선악과 미추를 구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사조를 분류하고 특정 작품의 예술사조를 찾는 역할 또한 담당한다. 예를 들어 관객은 사르트르와 카뮈의 작품을 보고 ‘실존주의’라는 사조를 떠올린다. 그리고 실존주의란 무엇이며, 이때 실존주의가 어떻게 작품에 드러났고 작품 속 실존주의가 어떤 방식을 통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지를 찾아본다. 바로 이 분류를 해내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분류는 자신의 역할을 찾고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다. 따라서 비평이 문학과 예술을 분류한다는 것은, 그동안 문단이나 예술사의 시선이 미처 닿지 못했던 예술작품을 발견하고 이에 알맞은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과 같다. 즉 명명(命名)을 통해 특정 예술작품 안에 있던 예술을 발견하고, 관객이 이 예술작품에 다가가 새로운 성찰과 반성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술사 안에서 세계의 성찰과 반성의 흐름을 찾고 특정 예술이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 등장한 새로움이라는 사실을 비평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 예시로 페미니즘 문학의 리부트를 들 수 있다. 페미니즘 비평을 통해 사회가 그동안 ‘타자’로 취급해왔던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여성의 시각에서 세계를 재편성하는 시도를 확장할 수 있었다. 남성들의 역사를 젠더의 관점에서 성찰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하고 그간 지배적이었던 남성성을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앞서 언급했던 비평의 성찰과 반성의 역할과도 맥을 함께한다. 새로운 사조의 등장에 알맞은 목소리를 찾고 그 의미를 발견해 줌으로 대중은 세계에 또 하나의 균열을 만들어 낸다.


예술은 사회의 발전과 변화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며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비평은 사회와 예술사적 흐름 안에서 예술의 위치를 배열하는 일이다. 이 배열을 통해 대중은 매 시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여러 갈래의 계보를 이어가면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위치를 살펴보고 또 다른 새로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비평은 이러한 정리와 배열의 작업이며, 그 배열 안에서 이 시대의 성찰과 반성을 끌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4) 나오며     


작은 의미에서의 비평이란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비평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이 나올 수 없으며, 이에 따라 더 큰 의미에서 비평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따라서 비평의 의미와 역할을 예술과 문학의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 비평의 역할은 예술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예술작품은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날 뿐이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벤야민의 예술철학을 인용하면서, 비평이란 예술작품을 해체하고 예술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관객을 통해 세계에 균열을 내는, 예술의 연장선에 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비평의 역할은 특정 예술작품의 예술사적 위치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과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한 예술사조의 재정립을 언급했다. 비평은 사회와 예술사적 흐름 안에서 예술의 위치를 정리하고 배열하는 일이며, 이 배열을 통해 예술가는 여러 갈래의 계보를 찾아보며 또 다른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두 가지 비평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탐구해 보았지만, 완벽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비평부터 오늘날의 페미니즘 비평까지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비평이 있고 그 나름대로 비평을 정의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평이 예술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성찰과 반성을 끌어내고 더 나아가 세계를 다르게 보는 시선을 제공하는 방편이 되리라는 것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예술이 정의되었을 때 그것을 평가하고 또 정립하는 비평 역시 정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이란 우리의 위치를 찾는 일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비평이라는 매개를 통해 예술을 탐구하고, 탐구한 예술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며, 그 새로움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예술과 비평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비평 역시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과 예술이 존재하는 한 대중은 매번 충격을 맞닥뜨리며 세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이란 세계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는 일이며, 그 안에서 실존을 마주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5) 참고문헌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비평(批評)’, URL: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 이용란. (2022). 발터 벤야민의 예술비평 개념 연구: 미, 숭고, 진리. 미학, 88(3), 199-242. 10.52720/MIHAK88.3.6

 김진환. (2023). 예술의 (자기)성찰로서의 독일 낭만주의 -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낭만주의 이론과 루드비히 티이크의 『금발의 에크베르트』를 경우로. 한국예술연구, (39), 259-280.

 김경연. (2022). 동시대성의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위하여. 오늘의 문예비평, (),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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