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이의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나는 신체 해부를 좋아한다. 병따개로 사람 목을 따고, 피로 얼그레이 하이볼을 만들고, 남은 머리에서 뇌를 꺼내 깨끗하게 씻은 뒤 하이볼잔을 장식하는 상상을 하는 게 좋다. 조금 더 나아가면 아주 미세한 청소기를 혈관에 넣어서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빨아들이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가위로 똑똑 잘라서 휴지에 싸서 버린 다음에 새로 자라기를 기다리는 상상도 한다. 나의 모든 이야기는 신체에서 시작해 신체를 절단하고 분리하며 끝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그게 재밌다.
무언가를 자르고 베어내고 뜯어내는 일은 작은 의식과 같아서, 내가 신체 이야기를 시로 쓰면 대부분 형식은 대충 갖춰진다. 그 이야기에는 신체라는 상황이 있고, 그 신체를 바라보는 화자(혹은 당사자)가 있으며, 신체가 해부되는 공간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를 가지고 시를 쓰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 신체를 독자가 느끼게 하는 데는 영 재주가 없다. 잘라낸 신체는 이미 뇌의 신경과 분리되어 더이상 ‘느낄’ 수 없는 무엇이 되니까. 그때부터 모든 이미지와 감각은 ‘시각’으로 제한된다.
그 점에서 강지이의 시집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는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시집 전반의 분위기는 시냇물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워서, 후반부로 갈수록 졸면서 읽었지만 곳곳에 드러나는 ‘여름 색채’와 ‘반짝임’이 눈에 띄어서 이 이미지들을 어떻게 감각으로 연결할지 머릿속으로 궁리하는 것은 재밌었다. 게다가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잠겨보려고 한다니, 시인에게 ‘수평으로 함께’ 잠겨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함께 잠길 그 상대는 어떤 이인지 고민해볼 수 있었던 점도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나는 시인이 이미지와 감각을 어떻게 연결하고 그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이어지게 만드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관계의 표현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을 눈여겨보았다. 그러자 ‘모래사장’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시집에는 모래사장과 관련된 시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시인이 시를 쓰는 방법이 모래사장에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모래사장에 시를 쓰고 그게 파도에 휩쓸려 지워지면 다시 그 자리에 시를 쓰고. 만약 다른 사람들이 시를 써놓은 자리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남아 있다면, 그 시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덧쓰는 것. 그것이 내가 본 강지이의 시 쓰기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영화 같은 기억 아니야?
이왕 영화 같은 기억이라면,
좀더 이 앞의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를 괴롭힌 인간보다
우리는 반드시 오래 살 거야
그러니 우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더이상
얽매여 슬퍼하지
않도록 하자
아니 아니, 이 장면 앞에는
이런 모습들이 있었다
이래서는 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바닷속에 손을 넣으면 내 손이 그냥 이대로
녹아 사라져버렸으면 해
- 「바다비누」 中
시 「바다비누」에서 화자는 ‘너’와 ‘나’의 관계를 ‘영화 같은 기억’을 필름 돌리듯이 자꾸 돌이켜보고, 그 과거 장면에 어울릴 법한 다른 장면들을 찾아내면서 이어진다. 그들이 기억하는 ‘그때 바닷빛은 너무 밝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억이라는 사진과 영상을 찍을 수 있었고, 그 장면들을 추억할 수 있었다. 다만 재밌는 점은 이들의 사진기가 감각이고 인화기가 기억이기 때문에 그들의 회상은 완벽하게 맞춰질 수 없고 어긋나는 지점들이 드러난다. 이 장면 뒤에 이 장면이 와야 하는데, 그건 당연한 건데, 기억의 일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그렇기에 화자는 ‘이래서는 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라고 속상해하는 것이다.
시인이 사용하는 배경은 주로 바다다. 그것도 여름 바다.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조차 없는 해변에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그곳에 물놀이를 즐기러 온 사람들은 눈과 손, 귀와 코로 모든 걸 기억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감각기관은 언제나 정확한 게 아니라서, 그때의 기분을 늘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매우 불안정하다. 장면을 완벽히 이어붙이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바닷속에 손을 넣으면 내 손이 그냥 이대로 / 녹아 사라져버렸으면 해’라고 화자가 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계속되는 기억을 희망하지만 끝내 지워지고 흔적만 남는 모래사장 시 쓰기라는 방법론을 생각해냈다.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놓고 기다리면 파도가 어느새 그 구덩이를 다 메우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모든 구덩이는 메워진다. 하지만 그 과정은 구덩이(감각)의 크기에 따라 더뎌질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해변이라는 시적 공간을 세우고 그곳에 시라는 구덩이(기억)를 판다. 구덩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도에 지워지지만 그 과정은 점진적이고 낭만적이다. 「설국(雪國)」에서 ‘사슴의 발자국에/내 발을 겹쳐보’는 일 만큼.
시집에 연작시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가 이미 써 본 시에 다른 시를 덧대어 보는 것. 그 시라는 구덩이(기억)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를 서보는 것. 아무리 파도에 휩쓸려도 시는 별개로 남으며, 그것은 기억의 레이어를 쌓듯이 시 속 ‘너’와 ‘나’의 관계를 구축하고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미 지워진 것 위에 또 지워질 것을 쌓는, 그리하여 현재에 집중하고 매일매일 신선한 관계를 맺는 시인의 방법론, 그게 시인의 시 쓰기 방법 -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는 법- 이라고 생각했다.
강지이의 시집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퇴적되고 압축되어 온 지층을 떠올렸다.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게 아니라 수평으로 점차 쌓여가는 것. 그건 이미지일 수도 있고, 감각일 수도 있고, 시어의 변용일 수도 있지만 그 레이어가 결국 시인과 독자의 사이를 이전과는 다르게 만든다는 점이 오래된 지층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수평으로 쌓이는 이미지는 앞으로 내가 신체와 관련한 시를 쓸 때 감각과 이미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해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미 절단된 신체와 시선 이외의 것으로 다시 연결될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들을.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는 한 번에 읽히는 시집이지만 두 번 읽었을 때 감각이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꼼꼼하게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밌는 시집이었다. 거대한 테마는 ‘여름 바다’로 잡았지만 중간중간 현대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한 작품이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동안 소설을 공부한다고 작법서만 읽었는데, 이제 다시 바깥으로 눈을 돌릴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 소설, SF, 동화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으로 수평으로 잠기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써 볼 의지가 난다. 앞으로 열심히 쓰겠다는 좋은 입김을 넣어준 시집을 만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