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어린이에게서 '어린이'를 빼앗지 마세요
'O린이'와 아동혐오 표현의 유행
지난 4월, 서울문화재단이 한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첫 도전과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린이’ 인증 사진을 올려 달라’는 내용의 캠페인이었다. 하지만 캠페인은 이틀도 지나지 않아 조기 종료되었다.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에서 네티즌들이 ‘○린이’가 아동 혐오 표현임을 지적하면서, 이벤트의 내용이 어린이날의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재단 관계자는 “‘○린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로 유통되는 줄 몰랐다”면서 이벤트를 일단 종료하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겠다고 답했다.
‘○린이.’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의 유행어가 된 이 단어는 ‘요린이(요리+어린이)’, ‘헬린이(헬스+어린이)’ 등 어떤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실력이 낮은 초보자를 이르는 신조어다. 최근 ‘○린이’ 사용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퍼지자, 해당 용어의 사용자들은 단순히 초보자를 귀엽게 이르는 말일 뿐, 혐오의 의도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얼핏 보아 ‘○린이’는 상급자가 초보자를 귀엽게 놀리는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이 단어는 명백한 아동 혐오 표현이다. ‘○린이’라는 말의 배경에 어린이가 초보자로서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상급자인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이를 무능력한 존재로 평가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에 갖추어 이르는 말인 ‘어린이’라는 단어를 특정 집단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어른’의 재미를 위해 변형했다는 점에서도 어린이를 향한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를 조롱하는 혐오 표현은 ‘○린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고 있는 ‘잼민이’라는 단어도 대표적인 아동 혐오 표현으로 지적받고 있다. 트위치 투네이션(Toonation)의 어린 남자아이 목소리 TTS인 ‘재민’을 따서 만든 이 신조어는 근래 어린 사람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되면서, 인터넷 내에서 어린이를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구강기관이 덜 발달되어 단어를 발음하기 힘든 어린이의 말투를 따라 하며, 그들의 약자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해당 용어의 사용자들이 ‘잼민이’, ‘○린이’ 등의 아동 혐오 표현을 ‘재미 삼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이 비하성 유머에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머를 통해 조롱당한 어린이는 사회에서 어떻게 배척당하고 있는가?
비하성 유머가 내포하고 있는 것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는 비하성 유머가 재밌는 이유로 ‘우월성 이론’을 꼽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움을 느끼고, 웃음은 그들에 대한 조롱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토머스 홉스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비하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기에 비하성 유머에 재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라 불리는 이러한 관점은 ‘○린이’의 사용에서도 그 특징이 드러난다. ‘○린이’는 어린이가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고, 어른들은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그들보다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임을 사회적으로 공고화한다. 즉, 자신이 아동보다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은밀히 드러내면서, 그 권력 관계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잼민이’라는 용어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를 존중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어린이’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잼민이’를 사용하는 것은 그 단어가 어른들에게 우월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누군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수많은 특질을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하고 변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소유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렇기에 어린이를 혐오 표현으로 부르는 것은 적극적인 호명 권력의 실현이며, 어른들은 어린이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강화함으로써 본인의 권력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어른들이 어린이를 비하하며 재미있어하는 동안 어린이는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한다. 사회적 존중에서 멀어지고, 공적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지면서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비가시화된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혐오에 대항하기 쉽지 않은 어린이의 위치를 생각하면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사회의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존재다. 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무능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가 바로 어른이다. 타인의 온정에 기대어 생존을 유지하는 어린이는 이러한 어른이 제공하는 무조건적인 돌봄이 끊기는 순간 생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그 점에서 어린이는 어른과의 관계에서 열세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적인 선물, 보호는 받는 사람을 무능력하고 열등한 위치에 서게 만든다. 어린이가 혐오 표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이 사회의 차별과 혐오로부터 쉽게 은폐되고 마는 까닭이다.
'노키즈존'은 누구를 배척하고 있는가
이미 몇 년 전부터 급속히 확산된 노키즈존에서 그 은폐의 방증을 찾아볼 수 있다. 어른들은 더 이상 공적 공간에서 어린아이들을 보길 원하지 않는다. 어린이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자신들이 불편해진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는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삭제되거나 재현될 뿐이다.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어린이는 사회의 지원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들의 보호자가 지배하는 사적 영역에 종속되고 만다. 다르게 말하면, 부모의 사유재산으로만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부모-자식 간은 ‘탄생이라는 빚’을 부담하는 채무 관계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에, 아직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어린이는 쉽게 부모에게 종속되고 사유재산처럼 다뤄질 수밖에 없다.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도 이러한 시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그들은 어린이가 ‘시끄럽고, 산만하고, 부주의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으로 ‘적절한 교육을 하지 않고 아이를 방치해놓는 부모’를 꼽는다. 노키즈존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사람들이 ‘노 배드 패런츠존’을 주장하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 있다. 어린이는 원래 부족하고 부주의한 존재이니, 그걸 통제하지 못한 주인, 부모에게 방기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쁜 부모’와 ‘좋은 부모’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 구분은 누가 정하는 걸까? ‘노 배드 패런츠존’은 ‘좋은 부모’를 선별해서 받겠다는 것부터 이미 ‘나는 너를 내쫓을 수 있다’라는 차별적인 시선을 담보하고 있다. 더군다나 노 배드 패런츠존은 이름만 바뀌었지, 어린이를 한 명의 독립체로 보지 않고 어른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사적 재산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노키즈존과 그 관점이 일치한다. 결국 노키즈존이나 노 배드 패런츠존이나 어린이를 향한 차별에서 탄생한 혐오의 결과물이란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어린이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과 우리 사회의 노력
그렇다면 이 만연한 차별과 혐오의 정서를 지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2019년, 윤가은 감독은 영화 <우리집>의 9가지 촬영 수칙을 시사회에서 공개하며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리집> 촬영 수칙은 어린이 배우를 프로 배우로 존중하며, 그들을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이자 삶의 주체로서 바라보자는 내용을 제1원칙으로, 어린이 배우와 함께 일하는 성인 제작진에게 총 9가지의 수칙을 지켜주길 당부한다.
이 수칙이 의미 있는 이유는, 성인 제작진이 어린이 배우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평등하게 대우할 것을 형식을 갖춘 ‘규칙’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칙을 만들게 된 배경으로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을 촬영했을 때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마음속으로 아무리 다짐을 해도 어린이 배우에게 차별적인 실수를 하게 되자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항목들을 규칙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개인의 인식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보호하려는 것을 명문화하여 다 같이 ‘차별하지 말자’고 적극적으로 개선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차별금지법은 우리가 서로 차별을 ‘하지 않게’ 만들자는 즉각적인 해법이다. ‘나도 차별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포함하는 이 해법은 실질적인 평등을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에 해당한다. ‘노키즈존을 하지 말자’, ‘어린이를 차별하지 말자’는 다짐으로는 차별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구조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되어 온 차별은 개개인의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개선되기 힘들며, 모든 이들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는 이상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차별의 고리를 끝내기 위해서는 차별이 발생하지 않게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어린이에 대한 차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어린이가 평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어린이를 배제하는 사회적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노키즈존 대신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늘리고, 언론매체에 대한 어린이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러한 노력을 다 함께 ‘공식적으로’ 이어가자는 의지의 표명이다.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상징이자 선언 말이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동등한 삶의 주체이며, 동시간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 중 하나다. ‘미숙함’을 이유로 그들을 사회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공적 공간에서 더 이상 어떤 어린이도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른들은 앞장서서 소외를 방지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며, 어린이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중받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가 될 것이다.
참고자료 :
1) 조유진, 「“~린이 표현 그만 쓰세요”… 뭇매맞은 서울시 산하기관」, 『조선일보』, 2021년 4월 26일.(URL :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1/04/26/UGMBMWWYARAAVJD5PYQMSJBZPI/?form=MY01SV&OCID=MY01SV)
2) 「미숙해도 괜찮은 세상이 필요하다 : '-린이', '잼민이' 등의 신조어 유행에 부쳐」, 『위티』, 2021년 5월 5일.(URL : https://wetee.kr/24/?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604866&t=board)
3)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86~87, 195, 201, 205면.
4)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172면.
5) 이승엽, 「“자녀 관리 못하는 무개념 부모 출입금지” 노키즈존 대신 ‘노 배드 패런츠 존’ 뜬다」, 『한국일보』, 2020년 1월 12일.(URL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1081488032165)
6) 이서현, 「윤가은 감독의 촬영 수칙」, 『dongA.com』, 2019년 8월 15일 입력, 2020년 5월 19일 수정.(URL :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90815/96973829/1)
이미지 출처 :
1) Michał Parzuchowski on Unsplash
2) Caleb Woods on Unsplash
3) 한동인, ‘노키즈존’, “손님 선택권이냐 역차별이냐” 논란 가중, 주간 현대, 2016.06.02(URL : http://www.hyundaenews.com/22636)
4) Artem Kniaz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