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

다시 굴러갈 바퀴

by 김태건

캐나다 온타리오주 그림즈비의 한적한 마을.

의외로 주차된 차량이 많은 상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작고 평범한 타이 레스토랑 하나가 있다.

이름은 ‘그림즈비 타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타이 음악,

그리고 창밖에서 당황스럽게 스며든 은은한 햇살이

내 가슴에 닿아, 오전 내내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를 조율해 준다.


조금 이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몇몇 노인 부부들만이 테이블에 앉아

음식과 대화를 조용히 나누고 있었다.


요즘 북미에서 아시아 음식이 인기라던데,

따뜻하고 고슬고슬한 밥 위에

갖가지 고기와 채소가 섞인 카레를 기쁘게 즐기는

노부부의 모습이 왠지 더 건강해 보였다.


얼마 전 햄버거 가게에서 봤던,

메마른 햄버거에 감자튀김을 콜라와 함께

혼자 드시던, 바짝 마르고 왜소했던 할아버지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정작 나 자신도,

건강과 이 소중한 점심의 여유를 느끼고 싶어서

땀과 먼지에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은 채 이곳에 와 있었다.



오늘의 스케줄:

Jee와 Woo, 그리고 해건 – 그림즈비 웨스트 링컨 메모리얼 병원.


나는 우레탄 스프레이 폼 기술자다.

집을 따뜻하게, 때론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단열재를 채우는 직업.

보통 ‘인슐레이터’라고도 불린다.


주로 상업 건물 작업이 많아서

학교, 병원, 시니어 타운 등 공공건물을 주로 맡아왔다.

이 병원도 봄부터 시작해 한여름이 지나도록 진행 중이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으니,

내년 봄쯤엔 시공이 끝날 수 있으려나 싶다.


오늘은 파트너가 쉬는 날이라 걱정했는데,

지호 형 팀과 함께하게 됐다.

내심 반갑고, 뭔가 새롭기도 하다.


8년 넘게 지호 형을 봐왔지만

우영 형님과는 간단한 인사나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으니,

이렇게 같이 일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게다가 저번 주 일요일,

듀에슬론에 참여했다던 형님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아우, 역시 여기 매운 카레가 최고야.”

지호형이 엄지 척을 하며 어깨와 눈, 코, 입을 모아 웃는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우영 형님을 힐끔 보더니,

말투를 확 바꾼다.


“야, 내가 달리기랑 자전거 타는 거 좀 작작하라고 했잖아.

더운데 일도 힘든데 왜 아까운 에너지를 땅바닥에 흘리고 다녀?”


목소리 톤은 날카롭고 높지만, 공격적이지 않다.

우영 형님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국을 먹으며

잠자코 듣다가, 당황한 듯 허허 웃는다.


나도 갑작스러운 흐름 전환에 멍해졌다가

웃음이 터졌다.


음식 이야기에서 갑자기 유산소 운동 비난이라니.

정신 차리기도 전에 또 이어진다.


“야, 너 입술 주변 좀 봐.

그게 다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다 땅 밑에 누워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작작 좀 해.”



가만히 보니,

우영 형님 입술 주변이 붉게 일어나 있고

군데군데 딱지가 앉아 있는 부분도 보였다.

그 갈라진 틈이 얼마나 아플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게 됐다.


그걸 본 우영 형님은 웃던 얼굴을 잠시 지우더니

어색하게 침묵이 흘렀다.


잠깐 정적. 그리고 지호 형의 말.


“그러게, 나랑 골프랑 스쿼시만 하면 되잖아.

이번 주 금요일 일 일찍 끝나면 스쿼시 예약할까?

날씨 좋으면 골프도 좋고.”


스쿼시와 골프, 나랑은 관련 없는 얘기라

이번엔 내가 주제를 돌렸다.


“우영 형님, 입술 진짜 많이 아파 보이세요.

저번 주 경기 준비하시느라 너무 힘드셨던 거 아닌가요?”


내 질문에 살짝 움찔하던 우영 형님이 말했다.

“이거…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야.”


옆에서 아주 매운 카레밥을 입 가득 물고 있던 지호 형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냥 밥이나 드세요, 형님.”


우영 형님은 눈으로 지호 형을 한 번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저번 주에 병원 갔었는데,

하루 종일 마스크 쓰고 있어서

그 습기에 곰팡이균이 감염된 거래요.”


그러자 지호 형이 갑자기 우영 형님 귀에 바짝 대고 속삭인다.


“내가 알아. 그건 곰팡이균 때문이 아니고,

네가 피곤한 거야.

아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우영 형님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이 전혀 미운 게 아니다.


나 역시, 8년 넘게 지켜본 지호 형의 그런 성격이

어색하지도 거슬리지도 않았다.



뭐 좀 과하지만, 꼬이지 않았달까.

불현듯, 예전 헬스장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산소만 너무 많이 하면 근손실 온다니까.”


그래도 결국 지호형이 걱정에서 나오는 말이니,

나는 우영 형님께 약 잘 바르고 잘 관리하라고 덧붙였다.


그때, 동글동글 친절한 점원이

“다 드셨으면 그릇 치워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지호 형은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내고,

나와 우영 형님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했다.

지호 형의 유산소 비난이 이어지는 사이

우리 셋의 접시는 어느새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뭐, 어차피 곧바로 일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은 아직도 여유로웠다.

점심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호 형이 화장실에 간 사이,

우영 형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해건 씨, 자전거 탈 줄 알아요?”


“자전거요? 많이 탔었죠.

어릴 땐 작은 아빠 쌀자전거 타고 광명에서 여의도까지 다녔고요.

캐나다 오기 전엔 출퇴근도 자전거로 했어요.

좋은 자전거는 아니었지만, 카본 자전거도 있었죠.

지금은 팔아버렸지만요…”


‘팔아버렸지만’이라는 말에 괜히 아쉬움이 따라왔다.


“그럼 해건 씨, 자전거 탈 줄 아는구나!”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의 예감이었을까.

잠깐 창밖을 바라보던 내 귀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이 감돌았다.


고개를 돌려 우영 형님을 바라봤을 때,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스마트폰이 울렸다.

“해건 씨, 나 우영인데… 지금 집에 있어요?”


“네, 방금 저녁 먹었네요. 형님은 식사하셨어요?”


“응. 진즉 먹었지. 가족들이랑 어디 좀 갔다가…

지금 근처인데, 해건 씨 10분 뒤에 잠깐 집 앞으로 나올 수 있어요?”


“네? … 아, 네. 알겠습니다.”


아내가 묻는다.

“누구야?”


“아까 지호 형이랑 우영 형님이랑 같이 일했다 했잖아.

그때 잠깐 자전거 얘기했었는데…

형님이 나중에 남는 자전거 하나 빌려주신다고 하셨거든.

지금 오신대.”


아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나는 피식 웃는다.


“내가 너무 캐나다 생활에 적응했나 봐.

되게 빠르네.

내 생각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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