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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May 01. 2021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는 점에 관하여.

영원회귀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제시된 '영원회귀' 사상은 삶에서의 무한한 반복을 말한다. 창조와 파괴, 발견과 망각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들은 서로 끊임없이 교차하며 인간의 삶을 만들어 낸다.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한 개인과 문명의 흐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반복이라고 한 점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말로 이 개념을 언급하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어 '뒤집어 생각해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혹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반복과 동시에 현재의 순간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영원회귀는 단지 지금 이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니, 현재에 더욱 충실하자와 같은 간단한 메시지만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현재 이 순간은 유일하지만, 어쨌건 우리는 이 순간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돌고 돌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거나 만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방랑자 그리고 집


2021년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그리고 여우주연상을 휩쓴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 (2020)>는 떠돌아다님 그리고 기억에 대해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떠돎, 유목과 같은 단순한 의미의 '노마드'가 아니다. 이 사람들은 미련 없이 길에서 그때그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정착해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기억하는 방법과 정착하는 방법을 적용해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펀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무너져버린 도시 엠파이어를 뒤로,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흔적을 뒤로하고 '선구자 (vanguard)'라는 이름을 붙인 벤을 타고 길 위로 오른다. 그녀는 집을 떠났지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하얀색 벤이 그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개념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은 그녀가 '나는 그저 거주지가 없는 것일 뿐,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펀은 길 위의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끊임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데,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하던 중, 한 사람이 집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말한다. "집은 허상인가, 안식처인가?" 여기에 이미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거주에 대한 답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생명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고, 재산을 지킬 수 있고, 삶의 추억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라면 편안한 곳, 쉴 곳, 안식처의 의미로 '집'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렇기에 그저 삶의 터전이 될 뿐, 꼭 정지되어 있는 곳일 필요는 없다. 펀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집은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한때 노마드 생활을 했던 데이비드의 집에 초대되어 며칠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곳은 방이 아니라 차였다. 이곳저곳 짐들이 어질러져 있지만, 예전 아버지가 줬던 단풍 무늬의 접시는 펀의 차 안에 있다. 남들에게는 집 같아 보이지 않지만 그녀에겐 편하고 나의 추억들이 담겨있는 '집'이다.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다


광활한 미국의 사막에는 수많은 노마드들이 있었고, 밥 웰스가 이끄는 커뮤니티도 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이렇게 길 위를 떠도는 사람들은 과거를 뒤로하고 미련 없이 머물렀던 장소들을 떠날 줄 아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떠나온 이유가 있었고, 떠돌아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도 정착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되뇌고 곱씹고 있었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 더 내면적인 것들을 저마다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펀은 남편과 일하던 도시를 잃은 후,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노마드 생활을 한다. 밥 웰스는 아들의 자살 이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마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스완키는 알래스카로 향하기 위해 이 생활을 이어간다. 이들은 본인들의 기억과 추억이 스며들어 있는 물건들을 두기에는 공간이 다소 좁은 벤에서 살아가지만 물리적 공간은 이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남긴 접시가 깨지자, 본드로 이어 붙이는 펀에게 '선구자'는 충분했고, 절대 빼지 않을 것이라는 반지는 남편을 기억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이들은 누구보다도 흔적을 열심히 남기는 사람들이다. 흔적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데이비드는 국립공원 내 공룡의 실제 크기를 가진 조형물을 바라보며, 실제로 예전에 이만한 공룡이 여기 살았을 것이라고 펀에게 말한다. 공룡은 거기 살다 갔고, 그 흔적은 희미해지지만 우리는 이러한 조형물들로 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는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돌을 모았고, 누구는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인연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렇게 노마드들은 최대한 많은 것을 뒤로 남겨두고 다시 길을 떠났다.


누군가를 기억해준다는 것


스완키는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줄까?'라고 펀에게 묻는다. 이어 본인은 평생 기억만 하면서 산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기억이란 건 어떤 것일까? 펀은 아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남편을 기억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곳곳에 놓아둔 조그마한 흔적을 누군가가 떠올려주고, 그것으로 떠난 자를 기억해준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스완키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를 만났던 사람들은 모닥불에 돌을 던지며 세상을 떠난 그녀를 기억해줬다.


밥 웰스는 아들의 죽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스완키는 생전 펀에게,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을 말해줬다. 어느 절벽에 매달려 있던 제비들이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날아다니고 있었고, 이 광경을 밑에서 지켜보던 본인도 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하는 과정들은 우리의 삶을 훨씬 더 가치 있는 곳으로 이끌어준다.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것이다."라는 펀의 대답처럼 말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7)>은 감독 본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흔적을 세상 이곳저곳에 남겨둔다. 내가 여기 있다 갔다는 것. 여기에 관련된 조그마한 상징물. 이 상징물을 보고 이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는 것. 그래서 기억과 추억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영화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잭 캔필드의 책 제목이었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1999)>. 니체의 영원회귀, 불교의 윤회 사상, 흘러간 그 강물은 지나간 것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인가에 관한 쿤데라의 질문, 이 모든 것은 <노매드랜드>의 바탕이 되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영원한 이별은 없다.'는 밥 웰스의 말처럼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누군가는 마지못해 떠났고, 누군가는 때가 왔기 때문에 떠나갔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펀은 드넓은 사막과 황야를 떠돌다 네바다 주 엠파이어로 돌아온다. 그때의 그 집으로 돌아와 눈물을 흘린다. 아픔으로 인해 영원히 길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 다시 그녀의 일부가 존재하는 곳으로 돌아온 펀이 좋았다. 이별도 상실도 없다. 그녀가 평생 손가락에 끼고 있을 반지로 그의 남편을, 맑은 두 눈으로 담아둔 뒷마당의 광활한 사막을, 길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을, 그때의 그 숨 막히게 아름답던 해 질 녘의 풍경을, 또 하나의 인연인 데이비드, 스완키, 린다를 기억하고 회상할 수 있다면 모두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문득문득 공허함을 느끼던 그였지만, 매번 과거를 지고 새 출발을 할 줄 아는 펀이야 말로 진정한 선구자일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제3부 '방랑자'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되돌아옴이 있을 뿐. 나의 고유한 자기, 그리고 이 자기를 떠나 오랫동안 낯선 곳을 떠돌며 온갖 사물과 우연들 사이에 흩어져 있던 것, 그것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노매드랜드


펀은 미국의 서부를 떠도는 동안, 깨달은 점이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말들을 하지 않는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빽빽한 대사보다는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펀의 침묵을 택했다. 나는 이렇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오히려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대자연 속에서 알 수 없는 답을 강구하고,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커다랄 수밖에 없어 말로 담아낼 수 없다. 정확한 답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펀은 길 위에서 치유를 받았고 나름의 다음 단계를 생각해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찾아온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것.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커다란 도전이기에, 벤의 이름은 '선구자'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 또한 있었다. 감정의 흐름을 이어가기에 방해가 되는 불쑥불쑥 들어온 편집의 지점과, 어느 순간 펀과는 조금 다른 리듬으로 가고 있던 자연 풍경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고 카메라가 담은 그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해 주인공은 물론 관객까지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작품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5)>라고 생각하는데, 극 중 휴 글래스의 상황에 따라 캐나다의 거대한 자연이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조명하고 있는 배경도 영화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노매드랜드> 또한 서부의 광활한 자연을 아름답게 담아냈음에도, 그저 펀이 바라보는 곳으로의 역할만 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풍경들이 영화의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함에도, 그저 배경 요소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부족한 점이 조금은 느껴지는 영화였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노마드들에 대한 감독의 깊은 고찰과 접근은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려주었다. 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방랑자'의 대목에 이어 니체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비로소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정상과 심연, 그것은 이제 하나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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