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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ul 20. 2021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자본과 종교, 둘의 마지못한 상생과 끝을 모르는 욕망에 관하여.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검은 피, 석유


석유를 뒤집어쓴 다니엘 플레인뷰

<데어 윌 비 블러드 (2007)>의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은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Oil! (1927)> 앞부분을 차용해 각본을 썼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문명이 거대화되어 가던 20세기 초반을 영화의 배경으로 하고 석유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당시 미국은 무섭도록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도시의 개념이 생겨나고 수많은 인구가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던 것은 아니다. 늘 그렇듯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 한정된 자원을 손에 넣은 자들만이 자본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여기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은광에서 사고를 당하며 평생 다리를 절게 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지만, 은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금방 흥분한다. 이렇게 돈에 큰 집념을 보여주는 다니엘은 이제 석유로 눈을 돌렸다.


석유는 인류 역사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다양한 분야에 쓰이면서 누군가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큰돈을 벌어다 주기도 했지만, 때문에 돈에 눈이 멀어 인간성을 상실한 경쟁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에 빠진 다니엘 플레인뷰에겐 시추 공사가 전부였고, 석유가 얼마나 나올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오직 석유와 돈만 보일 뿐이다.


내세와 현세 사이에서, 종교


제3계시교의 목사 일라이 선데이

미국은 종교 갈등으로 인해 탄생한 국가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성공회와 궤를 달리해 청교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종파들이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속 일라이 선데이는 작은 마을에서 제3계시교라는 이단 종교를 이끄는 목사이다. 하지만 마을의 규모가 작고, 풍족한 환경도 아니기 때문에 일라이는 종종 금전적 어려움을 겪는다.


종교도 사업이다. 일라이는 죄를 사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교회에 참석하기를 설파하지만, 사실은 신도들을 모아 수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다. 때문에 그는 다니엘 플레인뷰와 교리에 대해 논하기보다 계약금과 교회에 대한 기부금 등을 논한다. 순수한 목적에서 다니엘의 신념을 북돋아주고 구원을 도와주려는 목적이 아닌 그 또한 다니엘의 부와 능력을 자신의 사업에 활용하고 싶어 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공산당 선언 (1848)>에서 자유, 교육, 법, 종교, 가족 모두 물질적 생활 조건 속에서만 주어져 있기에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말한다. 이념 자체가 시민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석유와 종교의 마지못한 상생


송유관 사업을 위해 억지로 제3계시교 예배에 참석한 다니엘 플레인뷰

석유와 제3계시교. 자본과 종교.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이 두 요소는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이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교회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본인의 석유 시추 사업 중 노동자가 사망하고 양아들 H.W. 플레인뷰가 청력을 잃게 되는 등 좋지 않은 일이 반복되자, 일라이 선데이의 말대로 채굴 시작 기념식에서 그에게 축사를 맡기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품는다. 믿던 믿지 않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혹시 믿지 않아서인가' 하는 것이 종교의 영향력인 것 같다. 또, 이 마을의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쉽게 종교에 기대기도 한다. 종교는 이렇게 서서히 정신적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돈을 가진 자, 못 가진 자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종교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늘어나는 신도에 더 큰 예배당을 지어야 하며, 다른 지역에도 교회를 추가로 지어 널리 자신의 신념을 알려야 한다.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제3계시교는 더 나은 내세를 맞이하기 위해 존재하는 종교이지만,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업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둘은 마지못한 상생을 이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내면에선 상대를 보고 속물이라며 악감정을 축적해가기도 한다. 마을에서 석유 사업이 진행되던 동안, 다니엘 플레인뷰와 일라이 선데이는 서로를 욕심에 가득한 자로 바라보고 있었고 이 분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커져 결국 거대한 폭발로 이어졌다.


끝을 모르는 자본주의적 욕망


불에 타버린 시추 현장을 바라보는 다니엘 플레인뷰

이 영화에는 선한 사람이 없다. 두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와 일라이 선데이는 저마다의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다니엘 플레인뷰에 더 초점을 맞췄다. 그는 정말 멈출 줄 모르는 욕심을 보여준다. 돈과 석유에 인간성을 상실하고 폭주한다. 오직 돈, 돈, 돈 그리고 돈이다. 아들이 평생 들을 수 없게 되는 사고를 당했음에도 석유 걱정이 앞섰고, 사업에 이용하기 위해 남의 아들을 주워와 키웠다. 어릴 적 자신에게 보고 배운 석유 시추 과정을 이제 자신의 사업에 활용해보려 한다는 아들의 말에 경쟁사가 생겼다며 분노하고 질투한다. 헨리가 듣지도 못하는 아들보다 좋은 조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매정하게 농아학교로 보내버린다. 오로지 수지타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송유관이 지나갈 땅을 얻기 위해 일라이 선데이의 교회에 참석하며, 갖은 수모를 당한다. 그럼에도 폭력적인 의식이 끝나자 그는 앞을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송유관은 내 거야." 그의 숨 막히는 광기에 사로잡힌 욕망은 시커먼 석유와 같이 역류한다. 그리고 자신의 돈벌이에 방해가 된 일라이 선데이를 석유 찌꺼기에 처박아버렸고, 자신의 동생을 사칭하고 접근해 온 헨리를 석유가 스며든 땅에 살해 후 매장해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화나게 하고, 폭주하게 만들었을까?


마지막까지 석유 사업자 다니엘 플레인뷰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사업을 방해했던, 자신에게 모욕을 줬던 일라이 선데이를 잊지 않았고 영악한 자본의 현실을 가르친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이 세계의 법칙이라는 것처럼 그의 기준에서 덜 떨어진 자를 자신의 손으로 제거한다. 그리고는 마치 무엇을 이룬 것처럼 "다 끝냈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다


사고 현장에서 아들 H.W. 를 데리고 나오는 다니엘 플레인뷰

다니엘 플레인뷰는 자신의 사업에 방해물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상징인 석유에 박아버린다. 하지만 완벽하게 계산하고 움직이는 존재일 수는 없다. 결국 그 또한 정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내심 자신을 따라다니다 사고를 당한 H.W. 플레인뷰에 죄책감을 느끼며 돌보았고, 이 죄책감을 건드리는 스탠더드 오일의 간부에게 욕을 하며 아들은 건드리지 말라며 분노한다. 사람은 믿지 않는다며, 수익만 생각할 뿐이라던 그는 처음 본 사람임에도 당신의 동생이라는 말에 쉽게 신뢰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 부분과 관련해 <데어 윌 비 블러드> 속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은 다니엘 플레인뷰가 아들과의 인연을 끊고 상실감에 빠져 옛날 생각을 할 때이다. 순간적인 플래시백으로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H.W. 의 모습과 H.W. 와 지질 탐사를 다닐 때의 추억들은 그를 심하게 흔든다. 관계가 틀어졌던 아들이 용기를 내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사업을 시작하러 멕시코로 간다는 말에 또 한 번 본능적인 자본의 욕망이 드리웠고 질투심에 아들을 비난했지만 마음속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기억이 꿈틀댔다. 이 기억과 추억은 그를 더욱 피폐해지게 만든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1899)>에서 찰스 말로우는 이렇게 과거를 회상한다.

우리는 마치 어떤 저주받은 유산을 멋모르고 소유했다가 결국은 깊은 고뇌와 잇따른 고통을 대가로 치른 후 굴복하고 만 최초의 인간인 된 기분이었네.

고귀한 선의 존재가 있음을


그의 전부를 욕망에 사로잡히기 전, 다니엘 플레인뷰와 그의 아들 H.W. 플레인뷰

폭력과 어둠은 만연해있다. 식사 전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때리는 에이벨 선데이, 자신을 속였다며 헨리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과거에 당한 치욕을 또다시 살인이라는 복수로 갚아주는 다니엘, 약속대로 교회에 돈을 주지 않는다며 사람들 앞에서 치부를 공격하며 망신을 주고 자신에게 대공황의 존재를 일러주지 않았다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자칭 목사인 일라이. 이러한 감정과 행동의 반복은 욕망에 찬 폭력의 굴레를 만들어냈고 그곳엔 결국 피만 남았다.


하지만 메리와 같은 순수의 존재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다니엘이 교회에서 모욕을 당했을 때, 메리는 그를 진심으로 위로하며 안아줬다. 이러한 선한 힘은 매우 강력해서 석유를 뒤집어쓴 다니엘에게도 쉽게 도달된다. 결국 그 또한 메리에게만큼은 진심으로 지켜주겠다던 말을 하지 않았던가. 각자의 이득만을 계산하고, 각자의 목적을 먼저 달성하기 위하여 상대를 끊임없이 노려보지만, 이를 초월한 순수한 진심은 결코 때 탈 수 없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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