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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Sep 16. 2021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

삶의 연속성과 자기 확신에 관하여.

버드맨 혹은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 그리고 배우 마이클 키튼

영화 얘기를 하며 여태 본 최고의 영화를 말해보라 한다면, 난 항상 <버드맨 (2014)>을 빼놓지 않고 얘기했다. 이미 본 영화를 또 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만큼은 세 번을 보았다. 모든 면에서 엄청난 작품이라 생각하며, 이 작품이 나에게 준 의미는 매우 깊다.


우선 이 영화를 왜 이토록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탁월한 촬영 방법을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감독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시간을 종잡을 수 없는 롱테이크로 2시간을 이끌어갔다. 경이로운 수준이다. 카메라는 주인공 리건 톰슨을 그의 시야 앞에서 계속 따라다닌다. 그를 한 순간도 놔주지 않는다.


영화 <버드맨>을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속성 속의 흐름들


<버드맨>의 오프닝

끊임없이 울려대는 드럼 소리, 끊기지 않는 장면들. 영화는 마치 우리의 삶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처럼 끊을 수 없이 계속되는 연속의 흐름을 담아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 간당간당한 지속은 당장에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만 우선 결정을 하고 봐야 하며, 잠시 쉬고 싶지만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하는 연속을 말하는 것만 같다.


"당신은 그럼에도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네."

"그게 무엇이었나요?"

"내가 지구 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레이먼드 카버의 '레이드 프래그먼트' 중.


<버드맨>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린 자신이 지구 상에서 쓸모 있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고군분투하는, 추락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올라가 보려 하는 리건 톰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개인의 전투는 정신없이 이어지는 선 위에서 진행된다.


예기치 않은 것들의 다가옴


무언가를 일러주러 오듯 떨어지는 운석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그리고 롱테이크가 딱 한 번 끊기는 순간 이후, 이렇게 두 번 운석과 해파리의 장면이 나온다.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다. 오고 있다. 마치 리건 톰슨에게 무언가 전해주려 멀리서 오는 것과 같이 말이다.


리건 톰슨에게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몇 가지의 능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과거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 맡았던 역할의 버드맨은 계속 그를 따라다니며, 현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다. 때로는 그에게 현실을 타파할 속 시원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를 구속하는 한계점이 되기도 한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그 속의 대기실에서 리건 톰슨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불만을 품고는 또 다른 '나' 버드맨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긴 정말 끔찍해. 거시기 냄새가 진동하잖아.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니야."


초능력을 사용하여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리건은 종종 속에 꽉 차 있는 분노를 표출하는 데 그것을 사용한다. 방에 있는 꽃병을 깨고,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펼치는 상대 배우의 머리 위로 무대 장치를 떨어뜨려 다신 나타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깊은 염증 그리고 버드맨


리건 톰슨

그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고,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리건은 그의 친구에게 우디 해럴슨, 마이클 패스밴더, 제레미 레너와 같은 명배우들은 데리고 올 수 없냐고 묻는다. 그러자 친구는 답한다. 모두 망토를 입고 분장을 하느라 바쁘다고 말이다. 방구석의 TV에서는 아이언맨으로 큰 성공을 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다.


자신도 한때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캐릭터를 연기했었고, 지금과 같은 연극이 아닌 영화에 출연했었던 시절이 있음을 기억하는 리건은 또다시 저 안의 분노감을 느낀다. 현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이유는 그가 이전에 꿈꿨던 미래와는 너무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거로의 끝없는 회귀는 자신을 갉아먹지만, 여기에 돛을 달아주는 건 다름 아닌 과거의 자신 버드맨이다. "우린 진짜였어, 리건. 그땐 모든 걸 가졌었는데 다 날려버렸지. 가짜 배우들한테 왕국의 열쇠를 넘겨줬다고."


뭐가 진짜였다는 것일까? 진짜 초능력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초능력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것일까? 그래서 저 진짜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진짜 흉내를 내는 것이 웃기다는 것일까? 리건은 끝없이 지껄이는 버드맨에 닥치라 말한다. "분노를 실컷 포용해. 그래도 난 사라지지 않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잖아." 굴하지 않는 버드맨의 대답이다. 좋든 싫든 자신의 다른 목소리를 계속 달고 다니는 리건이다. 그리고 그 또한 은연중에 그 목소리에 동의하고 있던 것이다.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대기실에서 마음을 정리하는 리건

자신을 다잡을 때 바라보는 거울 밑에 이러한 문구가 붙어있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 버드맨의 시절은 지나갔고 이젠 날개를 떼고, 가면을 벗은 온전한 자신으로서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리건 톰슨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버드맨일 때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어딘가에 숨은 것이 아닌, 또 영화 속 수없이 편집된 자신이 아닌, 리건 톰슨으로서 지금의 나를 보여줘야 하는 연극배우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서 빛나야 한다. 무엇을 입은 내가 아닌 나 자체로 말이다.


하지만 "과거, 신화나 서사시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가 지금은 빨래 세제 광고나 만화 주인공에 의해 만들어진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를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말하던 리건 톰슨은 또 한 번 현실에 염증을 느낀다. 갑자기 끼어든 기자의 말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은 관심 없고 본인을 둘러싼 쓸데없는 가십만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정말 조금 더 깊이 있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다움을 보여주기에 여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여기가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이런 상황이 끝없이 반복되기에 리건 톰슨은 매일이 피곤하고 현실에 불만이 쌓여갔다.


반대의 등장


리건과 마이크

그러나 이런 리건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본인 또한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사실 <버드맨>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명확한 문제점 혹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리건 앞에 그와는 정반대의 마이크가 등장한다.


마이크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을 때만 진실된 자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오히려 무대 밑에서는 허영심에 차있지만, 대중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겐 이것이 진실이고 연극을 하는 이유이다.


이런 정반대의 주인공들이 무대 위와 아래를 옮겨 다니며, 불안한 연속은 계속해서 강조된다. 리건에게 있어 연극은 가짜이지만 자꾸만 현실과 혼동되며, 내면의 폭력성과 진심들이 연극을 매개로 삼아 계속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리건 톰슨이 연기를 시작했던 이유는 권위 있던 자가 냅킨에 써줬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자그마한 것 하나 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하지만 마이크는 그에게 그건 당시 그가 취해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취한 사람의 지나가는 한 마디에 자신의 진심을 걸었던 리건. 그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것 위에 서있는 걸까?


이런 리건에게 이 연극은 마지막 발악이었다. 우연한 사고로 담배를 피우려 건물을 나왔다가 가운이 문에 끼어 속옷 차림으로 뉴욕 브로드웨이 한복판을 활보하는 리건에겐 현실의 축소판이 보였다. 버드맨 분장을 벗고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날 것의 차림으로 대중 앞에 선 리건은 연극과 현실, 현실과 연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버드맨과 인간 리건 톰슨 사이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트위터 영상 속 리건이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연출과 같이, 우린 다시 이어지고 이어짐 속에서 걸어간다.


비평: 평가자


연극계를 쥐락펴락하는 비평가 타비사 디킨슨

예술을 따라다니는 존재는 비평이다. 이 비평에 대중은 그 작품을 걸작이라고 칭하기도, 평가할 가치도 없다고 칭하기도 한다. 그럼 비평가들은 무엇을 보고 비평을 해야 할까? 자신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바에서 우연히 만난 이름 있는 비평가 타비사 디킨슨에게 좋은 처신을 해야 했다. 하지만 타비사는 이미 상업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예술의 본질을 추구한다 믿는 연극으로 넘어온 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와 연극. 단지 이 둘의 개인적 차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펜으로 리건의 삶을 좌우할 수 있을까?


리건은 참지 못하고 비평가들의 낙인에 대해 비난한다. 일개의 지식과 주관적 판단이 없다면 본질을 볼 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늘을 나는 리건?

여기저기서 치이는 리건은 간절히 바라며 다시 한번 날아보고자 한다. 나는 예전 그 유명했던 버드맨이 아닌가? 다시금 버드맨이 나타나 그에게 소리를 질러보라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가느다란 "삐악" 소리뿐이다. 그는 한 때 이카루스와 같았다. 하늘에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이건 과대평가였던 것일까.


그럼에도 리건 톰슨은 다시 한번 날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일말의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생의 두 번째 비상을 준비하듯 그는 브로드웨이 그리고 세상 모두의 위를 날아다닌다. 비행을 마친 그는 다시 도로 위로 걸어 내려오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날아온 것 같지 않다. 택시의 문이 닫히는 걸 봤을 때, 어쩌면 그는 하늘을 날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상관없다. 우리는 '자기 확신'이 얼마나 고귀한 내면의 의식인지 알고 있으며, 리건 톰슨은 그것을 보여줬다. 얼마 전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주목을 받았던 선수 중 한 명인 높이뛰기 우상혁 선수는 아무도 못해 줄, 나만이 할 수 있는 확신을 보여줬다. 이건 내가 할 수 있을 수밖에 없고, 이것을 성공한 나는 두려울 게 없다는 마음가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큰 울림을 줬다. 내가 나의 한계점을 정할 수 있다는 것, 그 안에서 내가 나를 북돋아 줄 수 있다는 것만큼 우리에게 힘이 되는 생각이 또 무엇이 있을까?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해파리와 실탄


예기치 못했던 해파리들

누군가는 리건의 연극에 큰 기대를 하며 표값으로 500달러를 지불했다. 이건 그에게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최고의 기회이고 그는 정점에서 진짜를 보여주려 했다. 하는 척이 아닌 진짜 하는 것이다. 권총에 실탄을 넣고 무대 위로 올라간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여기 없어."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자신의 얼굴에 권총을 발사한다.


카메라는 처음으로 끊겼다. 이어지던 연속도 드디어 끊겼다. 최선의 선택을 한 리건은 과거 말리부 해변에서 해파리에 물린 적이 있다. 죽기 위해 바다로 들어갔지만, 해파리들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은 것이다. 고통에 리건은 해변으로 다시 걸어 나왔지만, 이미 이런 시도에서 그는 한번 죽었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을 맞닥뜨리려는 순간들은 그에게 다시금 새로운 연속을 만들어줬다.


그가 보여준 진실로 꽉 찬 연기는 비평가 타비사 디킨슨을 포함한 대중들의 호평을 받는다. 이 또한 자신을 파괴해야만 나오는 예술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번엔 '진짜' 내가 사랑받는 것일까?


버드맨 모양의 붕대를 쓴 리건 톰슨

권총을 본인의 얼굴에 쏴, 코가 날아간 리건은 병원에서 깬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또,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버드맨과 같은 가면을 쓰고 있다. 그토록 벗어나려 다짐하고 다짐했던 버드맨의 가면을 또다시 쓰게 된 것이다. 내면의 혼란과 우울함을 벗어던지고 가면을 쓰면 다시 잘 나가던 그때가 될 수 있지만, 정작 무대에서 내려와 가발을 벗고 거울 앞의 '진짜'나를 맞이하는 순간, 리건은 또다시 확신을 잃고 초라해지고 초조해지던 것이었다. 늘 실수만 저지르고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가 서있는 것이다.


이게 동료가 말하던 대성공인 걸까? 또 가면을 쓰게 된 나인데도 말이다. 이 대중의 열광 또한 그 옛날 버드맨 때처럼 언젠간 끝날 것이다. 그의 진심을 어루만져주는 딸 샘을 보며 그는 눈물을 흘린다. 시종일관 울려대던 드럼 소리는 끊겼고 드디어 고요해졌다. 이제야 모든 것이 안정된 리건은 다시 한번 나를 마주하기 위해 거울로 향한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샘이 어딜 바라보건 그는 날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금 본인의 실체를 목도하는 순간. 이미 그는 그가 아니었다. 코를 재건하면서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잘 있어. 그리고 엿 먹어." 변기 위에 좌절한 듯 앉아있는 버드맨과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리건은 말한다. 줄곧 그를 따라다니던 버드맨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저 그를 과거에 매달리게 하는 존재였다. 이렇듯 과거의 영광은 우리의 자부심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한 발을 떼지 못하게 잡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이제 그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어 뛰어내린다. 영화 자체는 열린 결말이기에 그가 추락사를 한 것인지,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따금 하늘을 바라보는 샘의 눈빛과 표정은 영화를 정말 의미 있게 끝낸다. 한동안 내가 엠마 스톤의 이 장면을 매우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장면을 남겨두고 싶어 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정신없는 연속성 위에서 흘러간다. 흔들리고 흔들리지만,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무거운 자기 확신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면, 흔들릴 것도 없지 않을까?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리건 톰슨이 진실을 맞이하는 거울에 꽂혀있던 이 말처럼. 다만,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은 '내가 지구 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리건은 한때 사랑과 존경을 헷갈려했지만, 그의 전 부인으로부터, 그의 딸 샘으로부터, 또 자신의 연극을 보러 왔던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확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이를 원천으로 그는 다시 한번 뛴다.


이상은 그의 작품 <날개 (1936)>를 이렇게 끝낸다.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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