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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평초 Oct 10. 2022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다.

연명치료 거부

혹시 아주 어릴 적 막연한 두려움, 불안감, 알지 못하는 감정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다 잠든 기억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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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으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는 항상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워 잠들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꽉 껴서 잠에 들 때면 너무나도 포근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가끔 아니, 생각보다 많은 밤에 가슴 깊은 곳을 먹먹해하며 어린 나이에 대체 뭔지 모를 감정에 몰래 눈물을 흘리다 잠든 기억이 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당시 느끼는 행복. 그 행복을 혹여나 잃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나는 엄마 없이  산다며, 내가 먼저 죽고 그다음에 엄마가 죽어야 한다고 아주 당당하게 매일 강조하며 엄마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주특기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니 전형적인 초등학생의 서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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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내가 엄마와 함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가서 ‘연명치료 거부 신청서’에 사인을 하고 왔다.

조금 컸다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딱히 슬프지 않은 마음으로 대비한다. 아니면 혹시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 오지 않을 일이라고 확신하며 죽음과 이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후자가 조금 더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아무튼 딱히 슬픈 감정이 들지 않아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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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엄마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연명치료로 치료비가 굉장히 많이 나왔고 연명치료를 종료하기까지 복잡했던 과정을 듣고 신청을 결정했다.

사실 이전에도 엄마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 이야기를  자주 했다. 아프고 힘들게 떠나기를 싫어했다. 인간이 정한 살아있다는 기준만을 충족시키는 연명치료를 부담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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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 거부 사인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선선한 가을 날씨와 선명한 가을의 색감.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공원 벤치에 앉아 여유를 느끼며 행복했다. 그런데 문득 어릴 적 자기 전에 느낀 감정이 또 나를 찾아왔다. “엄마가 죽으면 난 어쩌지?”라는 생각.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연명치료 거부 서명을 했다는 것을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생각은 더 나아가 극단적 예시로 “만약 연명치료를 하며 달고 있는 엄마의 호흡기를 내가 직접 멈춰달라고 할 수 있을까?” 와 같은 생각으로 흘러갔고 나는 멈칫했다. 못할 것 같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마음을 조금 추스르고 천천히 무엇이 옳은 것일지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틀렸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 관점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를 생각하는 아들로서는 엄마의 삶과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에게 엄마는 엄마지만 엄마에게 엄마는 자신. 본인. 이렇게 생각하니 남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인생에 나는 더 이상을 개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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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엄마 아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게 떠나길 바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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