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해서, 너무 유연해서

영화 <멋진 하루>

by 낮별


희수는 일 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 병운에게 빌려준 돈 350만 원을 받기 위해 그와 함께 하루 종일 서울 전역을 헤매고 다닌다. 영화의 도입부, 희수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어둡고 경직되어 있다. 온갖 부류의 여자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병운을 따라다니는 치욕스러운 하루에서 '멋진 하루'로의 변화는 희수의 경직된 표정이 점차 편안하게 풀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오면서 시작되었다. 그 미소는 삶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이 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적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대책 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강력한 심리적 자원을 가진 남자, 병운이 있다.

상담심리학적 관점에서 병운은 경이로울 정도의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을 가진 존재다. 그는 돈을 빌리러 다니는 비굴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죄인'이나 '실패자'라는 범주에 가두지 않는다. 타인의 타박이나 냉소조차 "근데 너 많이 예뻐졌다",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내가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을게"라며 일말의 주저함 없이 무릎을 꿇어버리는 사람이다. 이러한 병운의 유연성은 경직된 방어기제로 무장한 희수의 심리적 갑옷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희수는 병운의 대책 없는 천진함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다가, 점차 그 웃음 속에 자신을 짓누르던 긴장을 실어 보내게 된다.


또한 병운은 철저히 '지금-여기(Here & Now)'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에 침잠하는 대신, 그는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의 연결에 온 힘을 쏟는다. 과거는 모조리 실패했고, 현재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미래 역시 깝깝하기 짝이 없지만, 병운은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막걸리 가게를 열겠다는 다소 허황되어 보이지만 병운스러운 꿈을 간직한 채 그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한다. 대책 없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사람을 대하는 '편견 없는 시선' 때문이다. 그는 화류계 여성, 성공한 사업가 부인, 마트에서 일하는 이혼녀 친구 그 누구도 기능이나 계급으로 나누어 대하지 않는다. 랭키즘(Rankism)이 지배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병운의 그 차별 없는 친절은 그가 만나는 누구든지 "당신은 여전히 사랑받고 환대받을 가치가 있는 Somebody"임을 확인시켜 주는 치유적 경험이 된다. 그의 진심 어린 환대를 받아 본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그에게 마음을 건넨다. 언젠가 희수가 그랬듯이.


삶을 살아내는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적 성취 외에 삶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병운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보면서 희수처럼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특히 그가 가진 놀라운 심리적 유연성은 내 어깨의 긴장까지도 누그러뜨리게 했다. 병운의 유연성은 과히 연체동물급이다. 삶의 중심이 되어줄 척추조차 없음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웃음을 잃어버린 수많은 '희수'들에게, 병운은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보여준다. 비어있는 주머니와 불안한 미래조차도 타인의 온기를 믿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날은 누구에게나 '멋진 하루'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희수는 그 하루동안 다시금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왜 병운을 사랑했고, 왜 병운을 떠나야 했는지를. 유연해서, 너무 유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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