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징검다리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옥수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기 시작한다.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 해가 서쪽 산 아래로 숨는다. 산골의 낮은 유난히 짧다. 어둠이 마당을 지나 소년의 작은 골방으로 밀려든다. 저녁밥은 먹었을까? 소년은 아직 손이 야무지지 못해 아무렇게나 쌌던 책보를 풀어헤치고 책과 몽당연필을 꺼내 개다리소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석유 등잔불을 켠다. 소년이 혼자 중얼거린다. “엄마, 나 꼭 1등 할 거야.”
아침에 학교에 가니 검은 칠판에 백묵 글씨로 “총점 490점 평균 98점”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누굴까?’ 혼자 생각했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우리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이번시험에서 1등 한 점수다. 이게 누군지 알겠니?” 대답이 없다. 선생님께서 나를 보시며 “이게 전재에서 온 근수 점수다.” 순간 뛸 듯이 기뻤다. 겉은 조용했지만 속으로 ‘내가 해냈다.'는 생각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소년과 장군 중에서)
놀이에 열중하던 여심동 아이가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운명적이다. 어느 날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던 엄마 Y가 아랫묵에서 뒹굴거리던 아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근수야, 너 1등 한번 할래?" 아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후 Y는 도시 어딘가로 남의 집 일을 도우러 떠났고, 반년이 지나서 푸른빛이 도는 아이 반팔 T셔츠와 까만 반바지 2벌, 산골에서 처음 보는 고급과자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좋아라 하는 아이를 뒤로 한 채 시장 병원에 간다고 떠난 후 얼마되지 않아 죽음의 얼굴로 여심동 계곡 징검다리를 건너 아이에게로 돌아왔다.
엄마 없는 동안 아이는 엄마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공부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엄마의 부탁인 1등을 한 번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등잔불 아래에서 몽당연필을 들고 책과 씨름했다. 마침내 아이는 1등을 했다. 허나 아이가 1등 성적표를 받아 들었을 때 Y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Y가 아이에게 1등을 하라고 한 것은 놀기만 하는 아이에게 정신 차리라고 그냥 던진 말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한 아이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공부라도 잘해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소원이었을까? 속뜻이 무엇이든 그 후 아이는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공부를 했다. 공부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부재한 엄마가 기뻐할 상상 속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그 결과가 좋든 아니든 아이를 끊임없이 부추겼다.
공부는 여심동 아이가 사회적 언덕이나 바늘구멍을 통과할 때 요긴한 방편이 되었다. 중학교에 가서도 엄마의 유훈대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덕분에 학비가 전액 면제되고 기숙사를 제공하는 고등학교, 장교가 되는 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석박사도 국비와 장학금으로 마칠 수 있었다.. Y가 무심코 가난한 아이에게 해준 한마디 말이 낳은 기적이다.
공부는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것 이상이다. 아는 것은 마음의 눈을 밝혀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가면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방인의 언어를 안다면 색다른 그의 생각과 그의 문화를 알아낼 수 있다. 아는 것을 끊임없이 축적하고 아는 것의 최신화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사고력이 높아지고, 창조의 힘과 통찰력마저 생긴다. 이는 능력의 증진과 무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낳는다. 결국 인생의 징검다리 노릇을 한다. 공부의 효능이다.
여심동 아이는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고 엄마 Y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공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보물이고, 아이 인생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늙은 여심동 아이는 오늘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공부가 만능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도 아는 나이지만 공부를 하면 살아있는 엄마 Y가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다. (계속)
#이붕우 #공부 #엄마 #소년 #장군 #샘터 #금오공고 #육사 #박정희 #징검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