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를 건너다
여심동 아이는 얼굴과 피부가 까맣고 눈이 반짝거리는 또래보다 작은 아이였다. 말 수가 적은 데다 조그만 일에도 마음에 상처를 받고 처음 본 사람을 쑥스러워했다. 다행히 새로운 것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은 큰 편이었다. 말도 또박또박했다. 좀 우습고도 황당한 아이의 어릴 적 얘기다. 또래 아이들이 말을 배우던 3살 무렵 아이가 예상치 못한 어휘력을 구사해 동네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아이를 귀여워하던 동네 아주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가마솥의 엿을 주걱으로 젓고 있는데 천정의 흙덩이가 뚝 떨어져 솥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어쩌다 '풍덩'하는 소리만 들은 아주머니가 "방금 웬 소리가 났는데 뭐가 들어갔나?" 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등에 있던 아이가 대뜸 "눈깔을 뱀이 파먹었나, 흙이 들었갔잖아. “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볼기짝을 두들겨 맞고도 남을 아이의 맹랑한 말에 아주머니는 그만 돌리던 엿 주걱을 멈추고서는 파안대소를 하고 말았다. 아이 고모 만녀의 얘기다.
아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6년이 지난 1959년 동짓달에 여심동에서 태어났다. 매화산 아래 산골마을이다. 치악산이 높고 거친 산이라면 매화산은 그보다 조금 낮은 둥글둥글한 산이다. 마치 어머니 품을 닮았다. 계곡을 따라 띄엄띄엄 일곱, 여덟 채 집들이 있고 30여 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여심동 아이의 아버지 J는 집에서 한 5리 떨어진 금광에서 중간 책임자로 일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만주와 중국,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는 숱한 조선인을 전쟁터와 노동현장으로 끌고 갔다. 수탈은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김제평야를 비롯한 곡창지대 호남의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빼돌리고 방방곡곡 땅속을 헤집어 온갖 자원을 수탈했다. 조선의 금은 그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1920년대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는 일본산금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전국 각지에서 수 만 톤의 금을 캤다. J가 다니던 금광(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전재 소재)도 그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송광'이라는 조선인 사장이 운영했으나 나중에 일본이 운영권을 가로챘다. J가 금광에서 일하게 된 연유는 가세의 몰락에 있었다.
고모 만녀는 훗날 30대 나이에 들어선 여심동 아이에게 이런 얘길 들려줬다. 오빠 J와 나는 경기도 용인에서 1910년(1911년), 1914년 각각 태어났다. 아버지 이득룡(李得龍)은 만석꾼이었다. 원적은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현 양지면) 송정리 주마(막) 거리다. 큰 아버지 이름은 이천만이고 광산에서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큰 아버지 큰 아들 창호는 말을 못 하는 장애가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기운, 기남, 기식 등 3남을 두었는데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일제의 수탈로 집안이 망했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인 소유의 토지를 강제매입의 형식으로 강탈했다. 쌀이 일본으로 수탈되자 먹을 쌀이 귀해졌다. 이에 조선인들은 만주에서 수입한 좁쌀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이 만주 좁쌀이 만녀의 집안을 기울게 한 일제의 계략이 되었다. 일제는 좁쌀을 동네 주민들에게 빌려줄 때 지역 만석꾼이었던 아버지 이득룡의 도장을 받아 오라고 했고, 도장 보증을 담보로 좁쌀을 빌려 생계를 유지한 주민들이 이를 갚지 못하게 되자 이를 빌미로 집안 전 재산을 빼앗았다. 결국 모든 걸 잃고 곤궁한 처지가 된 나는 13살이 되던 해인 1927년에 4살 위인 오빠 J를 따라 강원도 산골마을로 흘러들어 왔다. 3년 후인 1930년 16세 나이로 오 씨 집안 청년 현선을 만나 혼례를 치르고 아들 둘을 낳아 길렀다. 오 씨들은 여심동 아랫동네 단지골 일대에 작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뜨내기들과 달리 농지를 소유하고 있어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다. 해방직전인 1945년 1월 2일 남편과 사별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고모 만녀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밥도 얻어먹고 놀기도 하였는데 옆집에 또래 친구 O가 있어 더욱 그랬다. 고모 만녀와 어머니 Y와는 올케와 시누이 관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J가 49세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뜬 후부터인지 그전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여심동 아이는 J가 사망하기 7개월 전에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17살 차이의 1942년생인 형과 7살, 3살 터울의 누나 2명이 있다. 홀로 된 Y는 갓난아이를 업고 15리(6Km) 떨어진 지구리에 살던 오빠 이무형 집을 오가며 생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며 살았다. 막내가 태어나자 4살이 된 여식을 무형에게 맡기는 처지에 까지 놓였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심이 깊었던 무형의 아내 김용자는 형편이 넉넉지는 못했지만 시누이 딸을 친자식 이상으로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여심동 아이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 J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어머니 Y의 품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사계절 산과 들판을 쏘다니며 뛰어놀았다. 봄에는 버들가지를 비틀어 피리를 만들어 불고, 냉이와 씀바귀, 고들빼기, 두릅도 찾아내었다. 여름에는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어 미역을 감았다. 너나없이 벌거숭이 몸에 진흙은 잔뜩 바르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첨벙첨벙하며 서로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어머니 Y를 졸라 곡식에서 돌이나 지푸라기 따위를 걸러내는 동그란 채를 빌려 계곡물 웅덩이의 말미꾸라지를 잡아 화로에 구워 먹고, 별이 쏟아지는 초여름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마른 쑥을 태우며 옥수수를 삶아 먹기도 했다. 형이 결혼날짜를 잡아놓은 해에는 큰 누나가 아이 속옷과 머리를 기어 다니는 이와 석회를 잡아주기도 했다. 가을철에는 집 옆에 있던 밤나무 아래 알밤을 줍는 재미가 쏠쏠했다. 밤에 잠이 들락 말락 할 때 후드득 알밤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리면 아침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며 선잠을 자곤 했다. 가을철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가재잡이다. 특별한 도구도 필요 없다. 가재 담을 주전자를 들고 여심동 계곡으로 가서 가재가 있을만한 돌만 들추면 된다. 돌 속에 숨지 않고 아예 나와서 돌아다니는 놈들도 있다. 그래도 가재잡이에 노하우는 있다. 흙탕물이 생기지 않게 돌을 살살 들추는 것이다. 그러면 가재라는 놈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놈의 몸통을 잡고 들어 올려 물을 채워둔 주전자 안에 쏙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이때 가재 놈은 도망치겠다고 뒷꼬리를 팔딱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주전자 속에 들어가자마자 주전자를 박박 긁으며 한 동안 몸부림을 친다. 그것도 잠시 자기들끼리 엉켜서 주전자 바닥을 발로 서걱서걱 기어 다니면서 운명의 순간을 기다린다. 가재 요리에 앞서 놈의 상체 뚜껑을 따고 계곡물에 씻을 때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다리와 꼬리를 움직인다. 생명의 몰락이다. 아이는 아직 죽음을 제대로 모르던 때다. 그저 된장을 풀고 삶은 빨간 가재가 맛있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산골 겨울은 오히려 역동적이었다. 쇠지렛대를 움직일 힘이 없는 아이는 동네 형이나 아저씨를 따라 물고기와 개구리를 넣을 고기 바구니를 들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형과 아저씨들은 크고 무거운 돌을 들쑤시며 족대로 고기와 개구리를 잡았고 아이들을 술판에도 끼워 주웠다. 술은 빼고 매운탕과 장작불에 구운 개구리가 아이들 앞에 놓였다. 어른들의 조수이던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건 계곡에서 설매타기다. 꽁꽁 언 계곡은 천연 얼음 슬로프다. 상류에서 하류로 외발 썰매로 속도를 내어 내려가는 것은 스릴만점이다. 간혹 넘어지기도 하지만 다칠 일은 크게 없다. 워낙 작고 좁은 곳이었으니 충격도 크기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철은 토끼와 꿩을 잡아 몸보신하는 시기다. 토끼는 철사로 민든 올무로 잡고, 꿩은 청산가리 독극물을 넣은 노란 콩을 먹도록 유인하여 잡는 방식이다. 이 위험한 방식은 어른들 몫이다. 아이들은 직접 만든 싸리나무와 노끈을 이용한 덫을 쓰거나 삼태기에 작은 막대기를 괴이고 그 안에 벼나 옥수수 알갱이, 콩 등을 넣어 참새 같은 작은 새 종류를 유인하여 잡는 방식을 썼다. 어머니 Y가 사망하기 2년 전 겨울인가, 아이는 이 방식으로 박새와 솔새 20여 마리를 잡아 Y에게 만두를 만들어 달라고 조른 적이 있다. 만두 맛은 잊었지만 박새가 덫에 걸려 있던 기억은 아이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여심동 아이는 집 앞에 있는 매화분교를 다녔다. 풍금 켜는 재미에 푹 빠진 적도, 선생님 잉크를 쏟아 혼이 난적도 있다. 동네잔칫날 잡은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불어넣어 만든 공을 운동장에서 차며 놀았다. 자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고, 윗동네 아랫동안 편을 먹고 전쟁놀이도 하였다. 중간정도에 살던 아이는 윗동네 형들이 왕관을 만들어 씌어주어 왕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 처음에는 10여 리(4Km) 떨어진 안흥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 1학년을 다녔는데 분교가 생기고 나서 2, 3학년은 매화분교를 다녔고, 4학년 때 다시 본교를 다녔다.
매화분교 앞에는 여심동 계곡물이 흐른다. 이 물이 흐르고 흘러 주천강, 남한강, 한강을 지나 서해바다로 갔다. 거기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어른들이 힘을 모아 임시방편으로 놓은 커다란 돌덩이 징검다리는 여름철 장마가 지면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아이는 장마철을 빼고는 매일 그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다. 그 징검다리를 아이 어머니 Y가 건너 다녔고, 아이가 건너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어머니 Y는 하얀 한복을 입고 건넌 징검다리를 죽음의 얼굴로 건너왔다. 아이 아버지 J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봄날이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여심동 까만 아이는 그 여파인지, 그의 운명인지 징검다리를 건너 세상 격랑 속으로 떠밀려 가고 말았다. 아이는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흘러흘러 넓은 바다에까지 다다랐을 여심동 아이, 황혼에 물든 옛날 그 아이는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 마음만은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 징검다리를 건너 고향집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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