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머리를 자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미용사분께서 “여기에 앞머리를 내면 훨씬 어려보이고 이쁠낀데” 하시기에 “그럼, 앞머리 내보까요?” 했더니 “일하러 어디 안다니제? 아 어마이가 뭐할라꼬?” 하시며 그냥 넘기시는 거다. 나는 어차피 앞머리를 낼 계획이 없었기에 앞머리에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지만 의문은 남았다. 일하러 안다니는 사람의 머리는 어때야 하는 걸까,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머리는 어때야 하는 걸까?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즈음 한 온라인 모임에서 근황을 나누며 그간 강사로서 위촉되어있던 몇몇 기관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조금 더 나의 강의에 집중하는 한 해를 만들어가겠다고 나름의 포부를 밝히자 이러한 응원이 돌아왔다. ‘멋있다. 축하해요. 그 머리가 대표들이 하는 머린가봐요. OO선생님도 그 머리잖아요“
나의 머리가 미용실에선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 여자의 머리’ 이면서 동시에 어떤 모임에선 ‘대표자 혹은 전문가의 머리’ 인 것이다. 내 머리는 그 날이나 이 날이나 똑같은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찰랑찰랑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하고 선거유세를 하거나 국회에 출석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슨무슨 기업의 CEO 하면서 나오는 화면 속 그들 머리길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죄다 짧다. 길어봐야 중단발이다. 마치 그들의 전문성은 짧은 머리카락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그런데 이 머리카락이라는 것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렵고 베베 꼬인 것이 한 운동선수는 머리길이가 짧다는 이유로 페미 아니냐며 금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는 되지도 않은 논란에 휩싸였고, 어떤 알바생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폭행까지 당했다는 거다. 짧은 머리카락이 ‘전문성’을 내포하거나 증거하는 거라면 운동선수의 짧은 머리카락에 환호하고 응원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알바생의 머리가 짧다면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를 기대해봄직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비난하고 폭행까지 하는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편 우리나라 할머니들의 트레이드마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만한 머리스타일이 하나 있다. 전국에서 다 같은 미용실을 다니시나 싶을 정도로 유사한 머리. 짧고 빠글빠글한 파마머리. 할머니들의 이러한 머리는 우리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로? 아님 페미로? 전문가로서의 기대를 받지도 않지만 페미아닐까 하며 공격받지도 않는다. 원래 그 나이 즈음 되면 자동으로 그 머리가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럼 할머니 나이 정도 되어야 드디어 ‘두발자유’가 실현되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두발에 자유가 있다면, 머리 짧은 사람의 수만큼 머리 긴 사람도 있어야 할 텐데 난 여즉 (영화나 매체가 아닌)일상에서 긴 머리를 푸르고 다니는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일상 속 성별고정관념이라는게 ‘보통 남자는 머리가 짧고, 여자는 머리가 길다’ 정도라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남성도 머리가 길면 어떤 특정 직업이신가? 성격이 특이하네? 좀 자르지? 정도의 시선을 받겠지만 여성의 경우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있다. 빠져나갈 틈이 안보일정도다.
전문성을 드러내려면 긴 머리보단 짧은 머리가 좋지만, 짧은 머리는 자칫 페미라는 인상을 풍길 수도 있으니 그에 따르는 폭력이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그게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절대). 또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예뻐 보이려 굳이 앞머리를 낼 필요까지는 없고, 할머니는 짧은 머리를 해도 괜찮지만 그렇다고 긴 머리를 푸르고 다니지도 않는다.
현실이 이러니 이 시점에서 나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정한 직업이 있으며, 아이를 키우고 있으나 할머니는 아닌 나이의 나의 머리는 어때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