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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Jun 09. 2024

나는 '친절'을 맡겨두지 않았다.

책 읽기, 내가 왜 예뻐야 되냐고요



"아빠, 만약 신이 있다면 말이야. 그 신은 정말 '어김없는 분'이야.

내가 오만해질 때마다 가차 없거든."


아빠와 둘이 둘레길을 걸으며 나는 말을 쏟아냈다. 강의를 하다 보면 유독 잘되는, 아니 된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말이 막힘없이 술술 나오고, 청중들의 눈은 즐거움으로 휘어지고, 담당자는 안도를 넘어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날이 몇 날 며칠 이어지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15년쯤 되었으면 나도 영락없는 전문가지' 자신감이 차오르고 기분은 한껏 가벼워진다.

그런데 이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이런 나를 추락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청중들의 교육 참여도가 낮거나, 교육 내용이나 방향이 원하던 것과 다르다며 왜 그런 식으로 교육했냐며 원망 섞인 말을 듣는다던가. 아예 애초에 '우린 이런건 싫어하니 이런 내용은 빼세요'라는 요구를 받는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젠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올랐다고 느끼는 순간 '웃기지 마, 아직 멀었어'라고 찍어 누르듯 이러한 일들이 생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심지어 누군가가 내게 '그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기를 요구받거나 하는 것들. 그럴땐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실은 생계를 좌우할만한 파이도 아닌데' 하고 그만두고 싶은 나의 마음까지 한데 뒤섞여 한동안 힘들다.


그러다 만난 책, '내가 왜 예뻐야 되냐고요'.

sns의 넘쳐나는 피드 속에서 얼핏 보기는 했지만 큰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인친님이 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않겠느냐 제안하셨고, 그분이 소개한 이 책과 공간에 이끌려 신청을 넣었다. 모임의 번째 나눔은 '이 책의 소감' 나누기였다.

'정말 친한, 믿을만한 언니한테 기분 좋게 등을 두드려 맞은 느낌이에요' 이게 나의 소감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그러했다.


사실 위에 열거한 피드백이나 요구들은 강사로서 흔히 받는 것들이다. 그런데 왜 이번이 유독 힘들었는지 생각해 보니 바로 이 '친절함'이 문제였다.



"누구에게든 당신이 원하는 걸 강요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친절'을 맡겨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당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행동해야 할 의무가 없다. 이 세상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다.
 - 내가 왜 예뻐야 되냐고요 P.192 "



순간 한 예능에서 애교를 떨지 않았다는 이유로 맹공격을 받고, 자신의 SNS에서 상냥한 말투로 소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수한 비난을 받았던 여성 연예인들이 내 맘을 스쳐 지나갔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친절함'을 맡겨둔 것처럼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또한 여성혐오의 일종이지 않을까).

 

내가 뭐 세상을 바꿀만한 인물도 아닌데, 내 생각으로 공격받거나 무시받는다면 그냥 그 부분만 솎아 내면 뭐 어때? 싶은 마음에도 이 책은 스매싱을 날렸다.



"문제를 끄집어내 분석하고 판단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가 특권이다.
(중략) 모든 이에게 이 여행을 시작할 능력과 시간, 그리고 자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그렇기 때문에 배우고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 내가 왜 예뻐야 되냐고요. P.35 '



위의 문장들을 마주하면서 뿌옇게 가라앉은 마음들이 서서히 선명해지고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들어온 버거운 강의의뢰도 산뜻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못해요' 소리 하기가 싫어 울며 겨자 먹기로 준비하고 긴장하며 덜덜 떨었겠지)


나는 누구에게도 친절을 맡겨놓지 않았고 또한 나는 내 특권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그것이 내게 그 어떤 위로나 편들기 보다도 더 힘이 되어주었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나를 야무지게 혼내고 단단하게 지지해 주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건강한 바운더리를 만들기 위한 체크리스트, 동의를 구하는 구체적 문장들, 건강하지 못한 바운더리 신호들, 성폭력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해야 할 말들, 데이트할 때의 위험신호, 나와 사랑에 빠지는 방법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실로 보물찾기 수준이다.    


기분 좋게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로 시작한 소감은, 딸이 중학생이 되면 함께 읽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감싸준 문장을 소개하고 글을 마쳐야지.



당신을 한 입 크기로 쪼깨지 마라.
온전한 상태로 남아
그냥 목구멍에 걸리게 내버려 둬라
- 내가 왜 예뻐야 되냐고요, 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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