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내야 하는 세상은 시끄럽다.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 경적,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뱉어내는 욕설, 직장인들의 상사를 향한 뒷담화, 콘서트장에서 떠나가라 외치는 환호성, 주인에게 불편을 알리려는 반려견의 짖음. 전쟁 중인 타국, 죽음을 코앞에 두고 외치는 약자들, 권리를 찾아 춤을 추는 그들. 우리가 각자의 곁에서 살아내고 있기에 우리는 평생토록 시끄러울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요한 세상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 "해가 지는 곳으로"는 고요한 세상을 살아가게 된 인물들이 각자의 소음을 찾아내는 방식을 다룬다.
우리가 고요에 떨어지기 전부터 미소의 세상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고요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지만, 이 즈음 미소는 이미 두려움을 넘어서 강해지고 있었던 거다. 미소는 청각 장애를 가진 인물로 사회적 약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는 미소와 같은 출발선에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고요한 세상의 두려움에 대해 깨닫는다.
실제로 미소는 언니, 도리가 무리에서 성폭행을 당할 때 소리를 못 들어 뒤늦게 알았으며, 도리가 미소를 찾을 때도 소리를 질러 찾지 못한다. 미소는 그저 조용히 나타나 곁에 존재할 뿐이다. 내가 미소를 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끄럽게 자신의 생존을 공표한다. 죽고 죽이고 정복하고, 약탈하며 '나'가 살아있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다. 내가 너흴 죽이고 생존하니 나 여기 있음을 알아달라고. 그러나 미소는 다르다. 언제나 고요하고 견고하게 살아간다. 도리의 곁에서, 지나의 곁에서, 건지의 곁에서, 류에게 선의를 받으며. 언제나 단단하다.
사람들은 고요한 세상이 도래해서야 고요함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몸소 깨닫는다. 앞으로의 미래를 두려워하며,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나타나길 기대하고 경계한다. 그것이 미소가 살아오고, 단단해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으로 내가 성장했음을 깨닫는 것이 가장 야비하다고 생각하는데, 고통으로는 특히 '타인의' 고통으로는 절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쌓아두고 덮어둔 채 나아가는 것일지 몰라도, 고통은 절대적으로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없다. 미소 또한 그렇다. 쌓아두고 덮어둔 채, 고요히 동화책에 자신의 말을 적어둔다. 그리고 도리를 살리기 위해 나아간다. 여전히 아픈 채로. 도리가 찾아나설 때 즈음, 다시 걸어와 곁을 지킨다. 미소는 언제나 아픈 채로, 담담히 곁에 있을 사람인 거다.
그리고 이런 상황임에도 찾아오는 선의가 있기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서로를 감내할 수 있다. 류는 도시에서 떠도는 두 여자애에게 약간의 먹을거리를 베풀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물리적 보상을 바라서도, 혹여나 흑심을 품고 벌인 일도 아니다. 그저 인간적으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류에게는 단과 자신 사이에서 낳은 해린과 해민이 있고, 남은 것은 해민. 해민 뿐이다.
이런 아포칼립스 장르에는 꼭 아이들이 등장한다. 앞으로의 미래를 후세대에게 맡기는 희망찬 메시지가 주력이기 때문이다. 현 세대가 벌여놓은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인물들은 지키고 살리기 위해 죽어간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죽음을 딛고 폐허가 된 세상에서 하나의 새싹을 보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살아남은 아이가, 후세대가 해야할 일이다. 구 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짓밟으며 나아가는 일. 그리고 류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어른이다. 해민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해낸다. 그것은 가족을 지키는 일이다. 아이를 지켜내고 가정을 지켜내는 일은 우리 모두가 가장 바라면서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류는 소설에서 독자가 가장 쉽게 편승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선한 어른이라서일까, 아이 해민을 거두고 있는 엄마라서일까. 그렇다면 모든 아이들은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가?
그 답은 지나가 속한 공동체이자 가족에서 볼 수 있다. 아니다. 모든 어른들은 아이를 보호하지 않을 수 있다. 일부 어른만이, 그러니까 류와 같은 평범하고 선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류는 그저 두 여자애가 굶지 않고 이 밤을 잘 지나가길 바랐으며, 후에 재회할 당시에도 이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 단을 찾으러 떠났다. 류는 영원히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는 사람일 거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가는 것처럼, 영원히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며 선했던 자들은 단단하다.
그렇다면 그에 반하는 어른들은 모두 약하고 악한가? 이런 세상에 떨어지면 우리는 모두 나약해지는가. S극에서 서로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고 식량을 나눈다면, N극에서는 나를 구하기 위해 총을 겨누고 약탈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의 악, 아포칼립스다.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지 않으면 다음 날 아침이 오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질 수 있으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다. 실제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건지는 이런 공포를 견디며 밤을 지내기도 한다. 무리는 힘을 가진다. 고요한 것들끼리 모이면 소음을 지닌 무리가 되고, 그 무리끼리 충돌하면 불협화음이 난다. 그 공간은 영원한 소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상이다.
힘을 과시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에 누군가의 편을 들 수 없다. 그러나 힘을 가진 자들은 꼭 약자를 괴롭히기 마련이라, 힘을 가지고도 약자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선한 캐릭터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소설에서 지나가 가진 힘이 이런 것이다. 무리라는 강자에 속한 이가 손을 뻗는 입체적인 매력. 우리는 이 소설을 이여기할 때 강자의 위치였던 지나와, 약자에 위치하던 도리와의 재회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나는 성폭행을 당해 무리를 피해 도망치는 도리를 뒤늦게 따라갔으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어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어린 지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나는 강자의 위치에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아빠가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리라 확신했으니까. 건지를 대할 때도 매한가지다. 지나는 강했기에 모두를 구원하고 그들의 동경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강함은 지나 자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지나가 속한 무리이자 지나의 보호자, 아빠가 강했기에 가질 수 있던 것이다. 현재 인물들이 발 붙이고 있는 물리적 공간은 러시아이고, 러시아는 '유라시아'로 동양도, 서양도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동양인 어린 여자애는 최하위층에 속한다. 약해지기로 마음 먹은 아빠는 딸을 강간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강자의 탈을 쓴다. 영원히 딸을 강간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들이 지나의 의지대로가 아닌, 그들의 의지대로 돌아간다.
동경의 대상이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적 있는가? 동경은 곧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드디어 동일선상에 있음을 깨닫게 되며, 당신의 추락을 아파한다. 지나는 도리를 그곳에서 만나지 않기만을 바랐고, 드디어 만났을 때 둘은 입을 맞출 수 있었다. 그들의 키스는 아프고, 아픈 곳에서 이루어진 키스는 영원하다. 고통은 절대적으로 잊히지 않고 쌓아두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다시 펼쳐 빠질 수 있다.
결국 그들이 도달한, 혹은 도달을 해 버린 곳에 폭탄이 떨어지며 류는 해민과 단을 찾으러 폭탄 속으로 달려가고, 지나와 도리, 미소는 함께 도망친다. 고요하던 세상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은 개벽을 의미하는가. 그저 세상을 원대래로 복구시키려는 누군가의 의지가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바뀐 세상은 모두 폐허가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된다. 모두가 고요 속에 살아봤기에 이제는 고요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안다. 그렇게 아픈 사람마 남게 되는 거다. 우리는 모두가 아프고, 아픈 세상 속을 살아내고 있다.
그렇게-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낸다. 류처럼 단을 찾기 위해 폭탄 속으로 뛰고, 꿈도 희망도 없는 곳에서 서로를 만난 지나와 도리처럼 서로를 위해 살아낸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미소가 모두와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으며, 모두가 해민을 살려내기 위해 애쓴다. 우리가 살아가고, 살아가게 성장시켜야 하는 세상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며 성장했을 해민을 위한 세상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 는 각자의 바이러스 속에서 살아내고 버티는 사람들을 위한 고백이다. 그들의 생사여부가 크게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고요하게 살아냄과 동시에 시끄러운 소음을 버티며 살아내야 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고요를 두려워하며, 시끄럽게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목적이며, 도달지이다. 각자의 소음을 감내하는 당신은 과연 닥쳐온 고요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디에 자리를 잡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 길의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것을 기적이 아닌 감내할 일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