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올해 첫 영화로 그레타 거윅 감독의 레이디 버드를 봤어. 주인공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장면을 담은 영화야. 결국 크리스틴은 크리스틴으로 살아갈까, 레이디 버드로 살아갈까?
영화에서는 종일 레이디 버드를 각인시키고 레이디 버드로 살아가는 크리스틴의 일상과 경제적 위기에 처한 가족, 소수자의 정체성이 강조돼. 레이디 버드로 살아가는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름과 가정, (구린) 경제적 상황이 싫고 뉴욕으로 떠나길 원하고 있어. 상류층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한 학생이야. 고급 저택에 살고 싶고 상류층의 아이를 질투하지만, 그것은 관심에서 비롯된 질투일 뿐. 뉴욕의 대학교에 지원하기도 해. 물론 당장의 상황은 만만치 않아. 돈이 없어서 새크라멘토의 성모 여고에 다니고 구린 집에 살고 있고, 심지어는 엄마의 말을 듣지도 않아.
버드는 학교에서 진취적인 여성으로 살아가. 레이디 버드라는 사랑스러운 이름과 함께! 대니와 사랑하기 위해 연극부에 들어가고 성적표를 버리며 성적을 조작하고, 교사의 차에 낙서도 해. 백이면 백 모두가 이건 문제 되는 행동이야, 라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이 레이디 버드로, 그러니까 새, 혹은 청춘으로 한번 정도는 놀아보고 싶은 학생의 욕망이라고 생각해. 나도 그랬거든. 고등학교에 다닐 때 괜히 조퇴하고 싶었고 선생님들을 골탕 먹이고 싶었고 성적을 조작하는 꿈도 꿨어. 백일몽으로 그쳤지만. 아무튼, 버드의 욕망을 막아서려고 대적하는 인물은 엄마야. (참고로 우리 엄마랑 나도 많이 싸웠어. 이제는 친해, 히히)
버드와 엄마는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갈등해. 조금이라도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고픈 버드와 현재를 즐기기에는 돈도 여유도 없는 엄마가 난 멀게만 느껴지진 않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도 똑같잖아. 아마도 현시대의 딸이라면 앞서 사족을 단 것처럼 엄마와 다퉜을 것이고 다툰 적이 없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생각했어. 우리 엄마랑 버드 엄마의 차이는 뭘까, 무작정 막아서는 것?
버드의 엄마는 버드를 무조건적으로 막아서며 기를 누르고, 어른 취급을 해. 버드는 어린 취급을 하는 엄마를 참을 수 없어서 매번 반항하고 어린아이로 남지 않기 위해 뉴욕 대학에 합격할 것을 진심으로 갈망해.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는 대기자 명단을 기다리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고대하던 운전면허를 따 (물론 전에 아주 많은 성장 서사가 있어). 결국 원하는 대로 뉴욕 대학에 합격하고 버드는 뉴욕으로 떠나. 반면, 엄마는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끝까지 외면하다가 보내지 못할 편지를 남겨. 그 편지는 후에 아빠가 몰래 버드의 가방에 넣어 전달해 줘. 버드는 뉴욕에서도 행복하지 못한 아이, 어쩌면 인종이 달라 소외된 병원의 아이를 보며 레이디 버드가 아닌 크리스틴으로 살아가길 결심해. 인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거잖아. 따지고 보면 이름도 그래. 태어나면서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정되는 개별성이지. 나는 영화에서 말하는 이름이 크리스틴의 개별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해. 크리스틴은 앞으로도 더 이름을 바꿀 수도 있어. 그러면서도 아마 크리스틴임을 잊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런 크리스틴의 다짐에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있을까.
난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언제나 더 위로 가길 갈망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는 더 나은 방식으로 향할 거야. 더 나은 이름을 찾아 새처럼 날 것이고 뉴욕에서의 생활은 이제 시작이니까. 엄마도 조금의 융통성을 되찾는 계기였다고 생각해. 현실에 얽혀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맞지만, 버드처럼 조금의 낭만은 향유할 수 있는, 아주 약간의 여유를 즐기는 그런 사람이 엄마였으면 좋겠어.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아빠는 나이가 많아 해고를 당하고 새로 찾은 일자리마저도 더 젊고 유능한 오빠-아들에게 빼앗겨. 기성세대와 후세대의 자리가 바뀌는 순간이야. 기성세대는 후세대를 위해 자리를 바꿔줄 의무와 책임이 있어. 그러나 이것을 대면했을 때-말로만 듣던 순간을 마주했을 때 오는 박탈감과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거야. 사회는 이것에 대응하고 대비할 제2의 삶을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다 못해 학교를 세워 취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노인을 위해 또 다른 일자리를 주는 정책을 세워 퇴직한 노인들이 또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야. 그리고 이 노인 문제는 젊은 후세대가 풀고 짊어져야 할 짐이자 의무이고 책임이야. 어렵다, 나는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슬프고 숨이 턱, 막히구.
영화에서는 이렇게 소수자가 끊임없이 등장해. 크리스틴의 오빠 미구엘이랑 여자친구 셸리는 고스펑크의 외형이야. 얼굴에 잔뜩 자리한 피어싱과 진한 화장, 검은색 옷만 입고 허브 담배를 피워. 셸리는 혼전 관계를 해서 본가에서 쫓겨나 크리스틴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어. 버드의 전 애인, 대니 또한 성 소수자야. 대니는 버드를 찾아가 울며 자신의 상황을 토로해. 자신의 성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 미래가 없다고 해. 카일 또한 너드를 자처하지만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사회를 스스로 멀리하는 학생에 가까워.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는 생각보다 우리와 가깝게 있어. 우리는 그들에게 손을 뻗고 함께 이겨낼 수 있어. 버드처럼. 일단, 내가 그러고 싶어. 너희도 그래?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암울하게 보이네. 사실 엄청 따뜻하고 다정한 영화야. 전체적으로 환한 계절감도 잘 보이고 특별히 과하게 눈에 띄는 연출도 없어. 일상을 담고 청소년의 성장과 방황을 담았기 때문에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야. 아마 킬링타임으로도 쉽게 보고 웃을 수 있을 걸.
나도 언젠가, 크리스틴-버드처럼 이름을 만들 때가 있었어. 사실 나는 지금도 만들고 살아. 뭔가 다른 내 정체성을 직접 창작하고 그것에 맞춰 또 다른 글을 쓰는 것, 이게 내가 사는 이유인 것 같아. 아주 언젠가, 그러니까 한 1500년 뒤에는 진짜 완전한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쓸 수도 있겠지. 난 크리스틴처럼 큰 인물은 못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힘내볼게.
아무튼, 다들 생각해 보자. 또 다른 내 정체성은 뭐고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갈망에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 새로 태어나고 싶어졌어. '새'로 태어나고 싶기도 하구.
안녕!